루케미아, 루미백승남 지음/한겨레틴틴·9000원
무균실에서 골수 이식을 마치고 항암 병동으로 옮겨온 강이는 갓 백혈병 진단을 받은 열한살 루미를 만난다. 갸름한 이마, 동그란 눈, 조그만 입, 퍼머한 듯 구불구불한 머릿결. 루미는 첫날부터 주사도 맞기 싫고 약도 밥도 싫다고 징징거린다. 어느 여름날 둘은 몰래 병원을 빠져나온다. 분주한 사람들, 적당한 소음, 찬란한 햇살, 싱그러운 나뭇잎, 바깥 세상은 눈이 부셨다.
<루케미아, 루미>는 백혈병에 걸린 열여섯살 소년의 투병과 성장기를 그린 소설이다. 절망을 딛고 일어서기, 투병이라는 ‘여행’으로 새롭게 발견하는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다. 퇴원한 강이는 루미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 바이러스에 감염돼 폐렴 증세를 보인 지 하룻만이었다. 강이는 꿈속에서, 창밖 놀이터에서, 통원치료를 하러 들른 병원에서 루미의 환영과 마주친다. 견고한 불투명 유리문 앞을 어른 몇이 서성거리는데 여자 아이가 하나 끼어 있었다. 설마…, 돌아보았을 땐 이미 사리지고 없었다. 싸늘한 냉기가 그를 훑고 지나갔다. “루미가? 말도 안 돼.” 루미의 집을 방문한 강이는 루미가 끝까지 접지 못한 종이학에서 루미의 글씨를 마주한다. ‘날고 싶다.’
작가 백승남씨는 소설 속 백혈병 환자의 일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백색 병실, 싱겁고 밍밍한 식단, 속을 뒤집어놓는 항암제와 견딜 수 없는 고통, 그리고 조금씩 다가오는 공포스런 죽음의 그림자. 이러한 사실 묘사는 작가의 현실 체험에서 나왔다. 작가는 실제로 백혈병으로 투병하고 있는 아들의 병실을 지키면서 고통의 순간을 낱낱이 기록했다.
강이는 무리한 외출로 그날 밤 열이 오르면서 극심한 통증을 느꼈다. 백혈병이 재발했다. 강이는 아프고 힘들고 서럽고 외로웠던 삶과 작별하기로 결심한다. 주사바늘을 잡아 빼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거리로 내달렸다. 열여섯 소년이 누리고 싶은 ‘평범한 삶’은 여전히 어둠 저편에 있는 불빛처럼 흐릿했다.
많은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병원의 혈액종양 병동과 무균 병실에서 평범한 일상을 반납한 채 신체와 정신의 ‘바닥’까지 내려가는 극한 체험을 하고 있다. 누군가는 순조롭게 퇴원을 하고 누군가는 몇 달째 그곳에서 ‘탈출’하지 못하고, 또 누군가는 결국 삶을 마친다. 작가는 “삶이란 어쩌면 죽음과 등을 맞대고 공존하기 때문에 더 빛나고 소중한 것”이라고 말한다. 구름이 지나간 높고 파란 하늘을 보고 또 봐도 싫증내지 않는 강이의 눈빛에서 ‘평범한 삶’에 대한 희망은 여전히 샛별처럼 반짝인다.
이충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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