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철학사1-지중해 세계의 철학이정우 지음/길·3만8000원
철학자 이정우(52·사진)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교수가 <세계철학사1-지중해 세계의 철학>을 펴냈다. 전체 3권으로 기획된 대작의 제1권이다. 지은이는 2000년 철학연구공동체인 철학아카데미를 세운 이래 줄곧 철학사 강의를 해 왔는데, 그 강의록이 이 저작의 바탕이 됐다. 전체 3권의 첫 권이라고는 해도, 이 한 권만으로도 200자 원고지 4000장, 840쪽에 이르는 분량이다. 지은이는 앞으로 2년에 한 권씩 ‘아시아 세계의 철학’(제2권)과 ‘근현대 세계의 철학’(제3권)을 펴낼 계획이다. 이 세 권이 모두 출간되면,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세계철학사 전체를 포괄하는 저작이 등장하게 된다. 지은이는 초국적 기업 중심의 비인간적 세계화를 넘어 보편성을 지닌 진정한 세계화를 이루는 것이 우리 시대의 과제라고 말한다. 그 과제를 해결할 비전을 찾아내려면 과거로 돌아가 그 시대를 역으로 음미한 뒤 현재로 돌아오는 거시적인 지적 성찰이 필수적이다. 세계철학사 집필은 과거를 경유해 새로운 비전을 찾으려는 노력인 셈이다.
이 저작은 ‘세계철학사’라는 이름에 진정으로 어울리는 기획의 산물이라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그동안 서구에서 나왔던 세계철학사 저작들은 사실상 서양철학사를 몸통으로 삼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인도와 중국의 철학 전통에 지면을 할애하더라도, 서구 철학사의 ‘전사’(前史)로 배치할 뿐이었다. 이런 식의 구도는 옛소련 소비에트과학아카데미의 <세계철학사>에서도 반복됐는데, 지은이는 이런 배치가 ‘헤겔적 편견’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말한다. 헤겔은 <철학사 강의>에서 비서구 지역 철학 전통을 철학사의 전사(프리히스토리)로 보았으며, 그런 전통은 오늘날 탈근대철학의 기수인 들뢰즈 철학에서조차 엿보인다는 것이다. “근대 서구인들에게 비서구 지역들은 반드시 ‘전그리스적’이어야 했다.” 지은이는 이런 편견에서 벗어나 인도와 동아시아 철학 전통을 제2권에서 ‘아시아 세계의 철학’으로 따로 서술한 뒤, 제3권 ‘근현대 세계의 철학’에서 다시 종합할 계획이다.
진정한 세계철학사를 쓴다는 지은이의 의지는 첫 권의 부제 ‘지중해 세계의 철학’에서도 확인된다. 지은이는 고대 그리스·로마 철학에서 서구 중세철학으로 이어지는 통상의 철학사 서술 방식에서 벗어나, 그리스·로마와 오리엔트(중동) 지역을 아우르는 서술 방식을 구사한다. 고대 그리스에서 이야기를 시작하되 소아시아·근동 지역에서 발원한 유대교·기독교 사상,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이어받아 중세 서양의 지적 부흥에 이바지한 이슬람 철학을 포괄해 서술하는 것이다. 이들 전체가 지중해 문화권의 자식들인 셈이다. 제1권은 이렇게 서양 중세 철학을 거쳐 르네상스 시기와 근대철학 성립기까지를 다룬다.
그런데 세계철학사를 그리스에서 시작하는 것도 서구적 편견의 소산은 아닐까? 지은이는 그리스에서 철학사를 시작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민주주의가 그렇듯이 ‘철학’이라는 말도 그리스에서 출현했기 때문이다. “민주정과 철학이야말로 그리스 문명이 인류에게 선사한 두 가지 아름다운 선물이다.” 지은이는 철학이라는 독특한 사유양식이 민주주의와 일정한 관련이 있다고 말한다. “전제군주와 일부 귀족계층이 모든 것을 좌우하는 사회에서는 철학이 탄생할 수 없다.” 그리스가 일찍이 민주주의를 탄생시킬 수 있었던 것이 그리스 문명이 바다를 중심으로 한 해양 문명이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육지로 직접 연결되지 않은, 조그만 나라들로 쪼개진 곳에서는 거대권력이 나타나기 어렵다.
또 해양 문명이 무역을 발달시키고 사람들의 ‘장사 감각’을 키웠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우직하게 땅만 파면 되는 농사와 달리 장사를 하려면 말을 잘하고 계산이 빨라야 한다. 그래서 말, 계산, 화폐가 발달하고 합리적으로 사리를 따지는 문화가 성립했다.” 그리스 문명의 이런 특징은 ‘로고스’(logos)라는 말에 응축됐다. “하나의 단어가 한 문명 전체를 드러내 보여주는 경우가 있는데, 로고스가 바로 그런 말이다.” 로고스는 말·계산·비례, 더 나아가 이성·추론을 뜻한다. “그리스 문명은 한마디로 줄여 로고스 문명이다.”
그러나 로고스 자체가 철학은 아니다. 철학은 이 세계 너머를 향해 질문하는 데서 시작한다. 그런 질문이 기원전 6세기쯤에 본격화하는데, 지은이는 그것을 정치적 격동과 관련시킨다. 귀족정에서 민주정으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엄청난 갈등과 혼란과 괴로움 속에서 사람들은 허무의 의식에 사로잡혔는데, 그 허무의 시대에 철학이 탄생했다는 것이다. 이 혼란한 시대에 어디에도 삶의 근거를 둘 수 없다는 생각 때문에 역으로 “참되고 영원하고 필연적이고 보편적인 것”을 필사적으로 추구하게 되는데, 그렇게 삶의 궁극적인 근거를 찾는 과정에서 발견한 것이 ‘아르케’(근원·원리)였다.
흥미로운 것은 이 아르케의 추구가 자연(‘피지스’)에 대한 탐구로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이 점이 인도·중국 철학과 확연히 구분되는 지점이다. 인도에서는 고(苦)로부터 해방되어 해탈에 이르려 하는 과정에서 ‘내면 지향’의 철학이 발달했고, 중국에서는 난세를 치세로 바꾸려는 노력 속에서 ‘사회 지향’의 철학이 발달했다. 반면에 그리스에서는 세계를 합리적으로 이해함으로써 존재의 흔들리지 않는 근거를 찾아내려는 과정에서 ‘자연 지향’의 철학이 태어난 것이다. 이때 사유의 결정적인 힘이 된 것이 바로 로고스, 곧 “개념화하고 논증하고 논쟁하는 능력으로서의 이성”이었다. 로고스라는 사유능력으로 피지스라는 사유대상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곧 철학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때의 철학이란 오늘날의 과학에 더 가까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사유의 문턱을 넘은 그리스 철학은 5세기에 소피스트들의 활약과 함께, ‘피지스에서 노모스로’ 다시 한번 비약한다. 노모스는 피지스(‘자연’)의 대응 개념인 ‘인위’, 다시 말해 법·규범·관습을 뜻하는데, 이것은 인문사회적 삶이 철학의 대상이 됐음을 알려준다. 이 시기에 민주정에 필요한 변론술·웅변술 따위를 가르치던 소피스트들을 “영혼을 겨냥하는 상품을 팔러 다니는 사람” 곧 ‘지식 장사꾼’이라고 불렀던 사람이 소크라테스다. 소크라테스가 강조한 것은 주장이나 믿음의 ‘근거를 대는 것’이었다. 근거가 부실한 믿음, 감정에 호소하는 주장이 판을 치던 시대에 끈질기게 근거를 물은 사람이 소크라테스였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소크라테스야말로 가장 엄밀한 의미에서 ‘철학’을 탄생시켰다.” 근거를 묻는 것이 소크라테스의 일이었기 때문에 그의 대화는 답 없이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에 등장하는 소크라테스가 그런 모습을 보여준다. 소크라테스의 집요한 물음에 사람들은 제대로 답변을 못한 채 떠나 버리고, 대화는 거기서 중단된다. 당장 답이 없는데도 끝까지 답을 찾는 노력에서 철학이 태어났으며, 그것은 그대로 시대의 난제를 해결하려는 지적 분투였던 것이다.
고명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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