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키아벨리의 네 얼굴틴 스키너 지음, 강정인·김현아 옮김/한겨레출판·9800원
근대 정치사상사 대가 스키너
독창적인 해설 담아낸 전기문
독창적인 해설 담아낸 전기문
‘한겨레지식문고’ 시리즈 하나로 나온 <마키아벨리의 네 얼굴>은 영국 정치학자 퀜틴 스키너(1940~·사진)가 쓴 ‘아주 짧은’ 마키아벨리 전기다. 짧은 전기라고는 하지만, 지은이가 근대 정치사상사의 권위자이자 공화주의 이론의 대가인 만큼, 단순한 입문서 수준을 넘어 마키아벨리 사상에 대한 독창적인 해설서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책의 초판은 옥스퍼드대 출판부의 ‘위대한 사상가 시리즈’로 1981년에 나왔다. 그 3년 전, 그러니까 1978년에 스키너는 자신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근대 정치사상의 토대>를 펴냈는데, 여기서 13~16세기 르네상스 시기의 서양 정치사상 형성을 깊숙이 탐색했고, 특히 마키아벨리 정치사상의 역사적 배경을 꼼꼼하게 답사했다. 그런 선행 연구를 전제로 삼아 이 마키아벨리 전기가 집필된 셈이다. 이 전기의 머리말에서 스키너는 “마키아벨리의 사상이 처음 형성되기 시작한 때로 되돌아감으로써, 당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졌던 도덕적 전제에 공격을 가한 마키아벨리의 비범한 독창성을 음미할 수 있다”고 말한다. 마키아벨리 언어의 역사적 맥락을 살핌으로써 그 의미를 한층 생생하게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 책은 니콜로 마키아벨리(1469~1521)의 삶을 네 시기로 나누어, ‘외교관’, ‘군주의 조언자’, ‘자유의 이론가’, ‘피렌체의 역사가’의 모습을 추적한다. 그 네 모습은 그대로 마키아벨리 일생의 흐름과 일치한다. 피렌체 공화국 외교관으로서 마키아벨리의 공직 생활 14년은 1512년 공화국이 몰락하고 메디치 가문이 복귀해 사실상 전제 군주국으로 돌아가면서 끝이 났다. 마키아벨리는 메디치 정권에 기용되기를 바라며 <군주론>을 썼지만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낙심한 마키아벨리는 공화주의자들과 허심탄회하게 어울리며 <로마사 논고>를 완성했다. 1521년 마키아벨리는 메디치 가문으로부터 피렌체 역사를 쓰라는 공식 임무를 받아 6년 동안 피렌체사 저술했다. 그게 화근이었다. 1527년 시세가 일변하여 메디치 가문이 쫓겨나고 피렌체에 공화국이 다시 들어섰을 때, 공화주의의 확고한 지지자였던 마키아벨리에게도 기회가 왔어야 했다. 그러나 메디치 가문 밑에 있었다는 사실 때문에 마키아벨리는 ‘전제정의 늙은 가신’ 취급을 받았고, 의지가 꺾인 마키아벨리는 병석에 누워 한 달 만에 눈을 감았다. 이 책은 마키아벨리에 대한 표준적 독해에 정면으로 맞서는 내용들로 채워져 있다. 지은이는 마키아벨리의 가장 중요한 개념인 ‘비르투’를 중심에 두고 이 문제를 풀어간다.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핵심 개념으로 사용한 ‘비르투’(virtu)가 마키아벨리의 독창적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 지은이의 첫 번째 지적이다. ‘비르투’란 ‘남성다운 남성에게 내재한 본질적인 자질’로서 역량·능력을 뜻하는데, 당시의 여러 ‘군주 조언서’들은 “비르투가 군주로서 성공하기 위한 열쇠라는 동일한 기본 원리”를 공유하고 있었다. <군주론>은 ‘변덕스러운 운명의 여신을 어떻게 하면 끌어들일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을 비르투에서 찾는데, 이런 식으로 운명과 비루투를 연결하는 것도 당시의 유행이었다. 심지어 “운명의 여신을 지배하고자 한다면 더 거칠게 다루는 것이 필요하다”라는 ‘도착적 쾌락’을 암시하는 구절조차도 마키아벨리의 고유한 발상이 아니라고 스키너는 지적한다. 마키아벨리의 ‘혁명’은 비르투의 개념을 재정의했다는 데 있다. 그 시대에 비루투의 내용은 로마 공화정 말기에 키케로가 여러 저작에서 설파했던 것을 복원한 것이었다. 이를테면 관후하고 자비로우며 정직해야 한다는 것이 키케로가 통치자에게 요구한 비르투였다. 마키아벨리는 바로 이 지점을 뒤집었다. “부도덕한 사람들로 가득 찬 어두운 세계”에서 이런 미덕들은 “파멸을 초래하는 명백한 오류”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면서 마키아벨리는 최고의 목표를 달성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면 “그것이 사악하든 유덕하든” 기꺼이 감행하려는 마음가짐을 비르투의 핵심 내용으로 제시했다. 키케로는 <의무론>에서 힘과 기만을 ‘짐승 같은 것’이라고 부정했지만, 마키아벨리는 힘과 기만이라는 ‘사자와 여우’를 군주가 가져야 할 비르투의 본질적 요소로 내세웠다. 이것이 마키아벨리 혁명이다. 마키아벨리를 대할 때마다 맞부치는 문제가 ‘군주를 위한 조언서’를 쓴 마키아벨리와 <로마사 논고>라는 공화주의 옹호서를 쓴 마키아벨리를 어떻게 연결할 것이냐라는 문제다. 스키너는 마키아벨리의 진정한 관심이 ‘공화주의’와 ‘시민의 자유’에 있었음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이 문제를 우회한다. 마키아벨리는 <로마사 논고>에서 “인민이 도시(국가)를 통치한다면, 그 도시는 매우 짧은 시일 안에 엄청나게 성장해” 위대함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마키아벨리는 또 <군주론>에서 군주 한 사람의 자질로 간주한 ‘비르투’를 <로마사 논고>에서 시민 전체가 갖추어야 할 집합적 자질로 이해한다. 시민이 이 비르투를 유지하지 못하면 공공선을 돌보지 못하게 되고 결국에 ‘자유의 공동체’도 잃게 된다는 것이 마키아벨리의 경고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영국 정치학자 퀜틴 스키너.
이 책은 니콜로 마키아벨리(1469~1521)의 삶을 네 시기로 나누어, ‘외교관’, ‘군주의 조언자’, ‘자유의 이론가’, ‘피렌체의 역사가’의 모습을 추적한다. 그 네 모습은 그대로 마키아벨리 일생의 흐름과 일치한다. 피렌체 공화국 외교관으로서 마키아벨리의 공직 생활 14년은 1512년 공화국이 몰락하고 메디치 가문이 복귀해 사실상 전제 군주국으로 돌아가면서 끝이 났다. 마키아벨리는 메디치 정권에 기용되기를 바라며 <군주론>을 썼지만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낙심한 마키아벨리는 공화주의자들과 허심탄회하게 어울리며 <로마사 논고>를 완성했다. 1521년 마키아벨리는 메디치 가문으로부터 피렌체 역사를 쓰라는 공식 임무를 받아 6년 동안 피렌체사 저술했다. 그게 화근이었다. 1527년 시세가 일변하여 메디치 가문이 쫓겨나고 피렌체에 공화국이 다시 들어섰을 때, 공화주의의 확고한 지지자였던 마키아벨리에게도 기회가 왔어야 했다. 그러나 메디치 가문 밑에 있었다는 사실 때문에 마키아벨리는 ‘전제정의 늙은 가신’ 취급을 받았고, 의지가 꺾인 마키아벨리는 병석에 누워 한 달 만에 눈을 감았다. 이 책은 마키아벨리에 대한 표준적 독해에 정면으로 맞서는 내용들로 채워져 있다. 지은이는 마키아벨리의 가장 중요한 개념인 ‘비르투’를 중심에 두고 이 문제를 풀어간다.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핵심 개념으로 사용한 ‘비르투’(virtu)가 마키아벨리의 독창적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 지은이의 첫 번째 지적이다. ‘비르투’란 ‘남성다운 남성에게 내재한 본질적인 자질’로서 역량·능력을 뜻하는데, 당시의 여러 ‘군주 조언서’들은 “비르투가 군주로서 성공하기 위한 열쇠라는 동일한 기본 원리”를 공유하고 있었다. <군주론>은 ‘변덕스러운 운명의 여신을 어떻게 하면 끌어들일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을 비르투에서 찾는데, 이런 식으로 운명과 비루투를 연결하는 것도 당시의 유행이었다. 심지어 “운명의 여신을 지배하고자 한다면 더 거칠게 다루는 것이 필요하다”라는 ‘도착적 쾌락’을 암시하는 구절조차도 마키아벨리의 고유한 발상이 아니라고 스키너는 지적한다. 마키아벨리의 ‘혁명’은 비르투의 개념을 재정의했다는 데 있다. 그 시대에 비루투의 내용은 로마 공화정 말기에 키케로가 여러 저작에서 설파했던 것을 복원한 것이었다. 이를테면 관후하고 자비로우며 정직해야 한다는 것이 키케로가 통치자에게 요구한 비르투였다. 마키아벨리는 바로 이 지점을 뒤집었다. “부도덕한 사람들로 가득 찬 어두운 세계”에서 이런 미덕들은 “파멸을 초래하는 명백한 오류”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면서 마키아벨리는 최고의 목표를 달성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면 “그것이 사악하든 유덕하든” 기꺼이 감행하려는 마음가짐을 비르투의 핵심 내용으로 제시했다. 키케로는 <의무론>에서 힘과 기만을 ‘짐승 같은 것’이라고 부정했지만, 마키아벨리는 힘과 기만이라는 ‘사자와 여우’를 군주가 가져야 할 비르투의 본질적 요소로 내세웠다. 이것이 마키아벨리 혁명이다. 마키아벨리를 대할 때마다 맞부치는 문제가 ‘군주를 위한 조언서’를 쓴 마키아벨리와 <로마사 논고>라는 공화주의 옹호서를 쓴 마키아벨리를 어떻게 연결할 것이냐라는 문제다. 스키너는 마키아벨리의 진정한 관심이 ‘공화주의’와 ‘시민의 자유’에 있었음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이 문제를 우회한다. 마키아벨리는 <로마사 논고>에서 “인민이 도시(국가)를 통치한다면, 그 도시는 매우 짧은 시일 안에 엄청나게 성장해” 위대함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마키아벨리는 또 <군주론>에서 군주 한 사람의 자질로 간주한 ‘비르투’를 <로마사 논고>에서 시민 전체가 갖추어야 할 집합적 자질로 이해한다. 시민이 이 비르투를 유지하지 못하면 공공선을 돌보지 못하게 되고 결국에 ‘자유의 공동체’도 잃게 된다는 것이 마키아벨리의 경고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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