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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잉여인간이여, 사냥꾼에 맞서 싸워라

등록 2010-10-15 18:03

〈모두스 비벤디〉
〈모두스 비벤디〉
폴란드 출신 망명 사회학자
‘유동성’ 시리즈 마지막 저작
“현대는 가혹한 지옥의 시대”
〈모두스 비벤디〉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한상석 옮김/후마니타스·1만원

폴란드 출신의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85·사진)은 ‘유동성’(액체성)이라는 개념의 소유권자다. 그는 이 유체역학적 용어를 자신의 서명이 들어간 개념으로 주조해 현대 사회 현상을 설명하는 데 적용했다. 우리 시대 세계의 질서와 제도가 고체성을 잃어버리고 끊임없이 유동한다는 것이 그의 근본 통찰이다. <모두스 비벤디-유동하는 세계의 지옥과 유토피아>는 그 ‘유동성’ 개념으로 우리 시대를 진단한 2006년 저작이다.

바우만이 국내에 알려진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그의 주저 가운데 하나인 <지구화, 야누스의 두 얼굴>이 번역된 것이 2003년이었다. 2008년 이후에 그의 저작들이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했는데, 먼저 <쓰레기가 되는 삶들>이 나오고, 2009년 <유동하는 공포>와 <유동하는 근대>(한국어판 <액체 근대>)가 번역·출간됐다. 이제 막 우리 학문세계 안으로 진입했다고 할 수 있는데, 그런 사정은 바우만의 본거지인 유럽에서도 그리 다르지 않다.

1925년에 폴란드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난 바우만은 사회학과 철학을 공부하고 1954년부터 바르샤바대학에서 가르쳤다. 그의 폴란드 생활은 1968년으로 끝이 났다. 이 무렵에 폴란드 공산정권이 벌인 반유대주의 캠페인으로 대학에서 쫓겨나고 국적을 박탈당했다. 조국의 버림을 받고 정치적 망명자가 된 바우만은 1971년 영국에 정착해 리즈대학 교수가 됐다. 바우만이 학자로서 명성을 얻는 계기가 된 것은 1989년, 예순네 살 때 펴낸 <모더니티와 홀로코스트>였다. 이 책에서 그는 홀로코스트라는 야만이 근대성(모더니티)의 산물임을 입증했다. 그 뒤 바우만은 ‘유동성’이라는 개념으로 현대세계를 분석하고 비판하는 저술 작업에 노년의 에너지를 쏟아부었다. 2000년 <유동하는 근대>를 펴낸 뒤, 2003년부터 <유동하는 사랑> <유동하는 삶> <유동하는 공포> <유동하는 시대>를 잇달아 출간했다. 이번에 우리말로 나온 <모두스 비벤디>는 이 마지막 저작 <유동하는 시대>의 번역판이며, 제목은 이탈리아어판에서 따왔다.


지그문트 바우만(85)
지그문트 바우만(85)
바우만은 근대를 ‘견고한 근대’와 ‘유동하는 근대’로 나누고 견고성(고체성)에 유동성(액체성)을 대비시킨다. 유동성이 바우만의 독창적 개념인 것은 분명하지만, 원천이 없는 것은 아니다. 바우만은 <유동하는 근대>에서 카를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을 언급한다. 마르크스는 1848년에 쓴 그 기념비적 팸플릿에서 부르주아 세계를 끝없는 유동성의 세계로 묘사한다. “부르주아 시대는 생산의 끊임없는 변혁, 모든 사회적 상황의 부단한 동요, 영원한 불안과 격동을 통해 다른 모든 시대와 구별된다. 견고하고 낡은 모든 관계들은 … 녹아버리고, 새롭게 형성된 것들도 모두 자리를 잡기도 전에 낡은 것이 되어 버린다.” 바우만은 마르크스 시대에 벌써 이렇게 간파된 근대 세계가 최근에 이르러 진정한 유동성의 시대로 전환됐다고 본다. 그가 보기에 이런 전환은 1970년대 10년 사이에 이루어졌다. 그 시대는, 요즘 유행하는 용어로 말하자면, ‘신자유주의’가 지배적인 것이 된 시대다.

<모두스 비벤디>는 이 유동성의 시대가 만들어낸 악몽과도 같은 현실을 묘사하고 비판한다. 이 책의 요지는 라틴어 제목 ‘모두스 비벤디’(생활양식)보다는 부제 ‘유동하는 세계의 지옥과 유토피아’에서 더 빨리 포착할 수 있다. 유동성이 지배하는 우리 시대는 지구적 차원의 지배 엘리트들에게는 ‘유토피아’일지 모르지만 나머지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불안과 공포가 일상이 된 ‘지옥’의 시대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이주자·난민이 돼 정착할 곳을 찾지 못하고 잉여인간으로 떠도는 시대다. 삶이 처치 곤란한 ‘쓰레기’가 된다. 바우만은 이런 시대의 특성을 ‘열린 사회’의 역설로 설명한다. 카를 포퍼가 전체주의적인 ‘닫힌 사회’에 맞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사회로 제시했던 ‘열린 사회’는 오늘날 “운명의 횡포에 무방비로 노출된 사회”로 귀착하고 말았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지구 전체를 휩쓸면서 빈곤과 불안과 범죄와 테러도 지구 전체로 퍼졌다. 그리하여 ‘열린 사회’는 두려움으로 오그라든, 공포에 휘둘리는 사회가 됐다.

바우만은 이 책에서 ‘사냥터지기’ ‘정원사’ ‘사냥꾼’이라는 비유를 들어 시대의 근본 특징을 묘사하기도 한다. 전근대 사회는 자연환경을 사냥터로, 인간 자신을 그 사냥터를 지키는 존재로 생각한 사회였다. ‘자연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인간의 사명인 시대였다. 반면에 근대는 ‘정원사’의 시대다. 세계는 일종의 정원이며, 사람들은 자신이 디자인한 모습으로 정원을 꾸민다. 바우만은 정원사의 시대를 ‘유토피아의 꿈’을 실현하려고 노력하던 시대라고 말한다. 그 시대가 끝나고 말았다. 지금은 사냥터야 어찌 되든 짐승만 많이 잡으면 된다는 사냥꾼의 시대다. 사람들은 사냥꾼이 되느냐, 사냥감이 되느냐 하는 가혹한 이분법의 처지에 놓였다. 사냥꾼에겐 유토피아지만 사냥감에겐 지옥이다. 바우만은 결론에서 지옥을 거부하고 저항하라고 말한다. “(이 지옥을) 받아들이라고 강요하는 온갖 종류의 압력에 맞서 용감하게 싸워야만 한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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