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폭탄 폭격 뒤의 히로시마 풍경.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발생한 사망자 22만5000여명의 95% 이상이 민간인이었고, 대부분 여성이거나 어린이였다. 사이언스북스 제공
직접 개발한 원자폭탄 반대하다
매카시즘에 스러진 오펜하이머
25년 자료 조사 토대로 한 평전
매카시즘에 스러진 오펜하이머
25년 자료 조사 토대로 한 평전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카이 버드·마틴 셔윈 지음, 최형섭 옮김/사이언스북스·4만원 ‘원자폭탄의 아버지’라 불리는 미국의 이론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1904~1967·사진)는 과학의 사회적 책임과 국가 권력과의 관계에 대해 깊은 고민거리를 던져준 논쟁적인 인물로 꼽힌다. 미국 정부의 원자폭탄 개발 프로젝트인 ‘맨해튼 프로젝트’를 주도했던 그는, 실제 원자폭탄이 투하된 뒤에는 핵무기의 위험성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다가 매카시즘의 광풍에 휩쓸려 추락했다. 언론인인 카이 버드와 대학 교수인 마틴 셔윈이 함께 쓴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는 25년 동안의 방대한 자료 조사와 인터뷰를 통해 오펜하이머의 일생을 섬세하게 되살려낸 전기다.
오펜하이머는 미국 뉴욕에서 독일 출신 유대인 이민 1세대 사업가인 아버지와 이민 2세대 화가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 부모의 아낌없는 배려 아래 성장한 그는 당시 중산층 독일계 유대인들의 개혁적이면서도 윤리적인 정신 문화에 큰 영향을 받았다. 그는 내성적인 성격이었으나 어렸을 때부터 천재성을 드러냈고, 인문학적 관심도 높아 박학다식했다. 그는 하버드대에 진학해 화학을 전공했으나, 물리학에 깊이 빠져들어 독일 괴팅겐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막스 플랑크의 양자 발견,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 이론, 하이젠베르크의 행렬 역학, 슈뢰딩거의 파동 역학 등 당시 물리학은 새로운 발전을 날로 거듭하고 있던 분야였다. 박사 학위를 마치고 미국 캘리포니아대와 버클리 분교의 교수가 된 오펜하이머는 이론물리학계에서 주목받는 연구자로 활약했다.
“정치란 진·선·미 가운데 무엇과 관계가 있느냐”고 물을 정도로 정치에 관심이 없었던 그는, 독일에서 나치가 집권한 1930년대에 들어 정치사회적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대공황에 따른 당시 피폐한 삶의 풍경도 계기가 됐다. 그는 파시즘을 반대하는 다양한 공산주의자들과 교류를 맺었고, 교수노조를 만들어 독일에서 쫓겨난 유대계 과학자들이나 스페인 공화파를 돕는 기부금을 조성하는 등 직접적인 실천에도 나섰다. 그의 이러한 정치적 행보는 뒷날 매카시즘 공격에 큰 빌미를 주게 된다. 지은이들은 당시 미국의 지식인들이 기본적으로 평등주의에 관심이 높았다고 풀이하며, 오펜하이머에 대해 공산주의적 성향보다도 앞서는 ‘애국자’로서의 면모가 강했다고 설명한다. 이념적인 배경보다도 공동체의 삶을 중요시하는 책임감으로부터 나온 행동이었다는 것이다.
지은이들은 원자폭탄 개발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그의 행보 역시 ‘파시즘과의 전쟁에서 이겨야 한다’는 애국주의적 인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본다. 미국 루스벨트 행정부는 1939년 핵분열 연구를 위한 우라늄 위원회를 구성했고, 이는 실질적인 핵무기 개발을 이끌어낼 ‘맨해튼 프로젝트’로 연결됐다. 과학자들과 군인들이 모인 로스앨러모스의 비밀 연구소는 원자폭탄의 실질적 개발을 위한 연구에 박차를 가했으며, 오펜하이머는 이 프로젝트의 총책임자였다. 오펜하이머는 “나치보다 먼저 원자폭탄을 개발해내는 것이 시급하다”고 말했으며, 이것은 그때 참여한 과학자들에게는 보편적인 인식이었다.
그러나 이미 패색이 짙었던 일본의 두 도시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뒤, 그는 핵무기에 대해 비판적 입장으로 돌아섰고 수소폭탄 개발에도 공개적으로 반대했다. 그는 “대단히 끔찍한 무기를 만들었다”며 “과연 과학이 인간에게 유익하기만 한 것이냐”는 질문을 던졌다. ‘원자폭탄의 아버지’는 미국 정부의 믿음과는 달리 미국의 핵 독점이 유지되기 어려울 것이며, 앞으로 인류 전체의 생존을 위협할 핵무기 개발 경쟁이 이어지리라는 사실을 내다본 것이다. 실제로 미국은 50년 동안 7만기 이상의 핵무기를 만들게 되고 핵무기 프로그램에 5조달러가 넘는 엄청난 자금을 쏟아붓게 된다.
오펜하이머는 대신 닐스 보어가 먼저 들고 나섰던 ‘열린 세계’라는 개념의 원자력 에너지의 국제 통제를 주장했다. 원자력 에너지에 대해서는 각 나라들이 주권을 포기하고, 비밀 없이 모든 내용을 공유하는 국제적 통제기구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워싱턴 정계에서 자신의 뜻을 관철하기 위한 정치적인 노력도 기울였으나, 결국은 매카시즘의 희생자가 됐다. 1954년 원자력 에너지 위원회는 자문위원 자격을 상실시키기 위해 오펜하이머를 고발했으며, 공산주의자로 몰린 그는 청문회에서 온갖 수모를 당한 뒤 모든 공직에서 쫓겨났다. 그는 후두암으로 62살에 숨졌다.
오펜하이머는 ‘현대 핵 과학자의 비극의 상징’이었다. 지은이들은 한국어판 서문에서 “오펜하이머의 삶과 고민은 누구보다도 대한민국의 독자들에게 실제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닐 것”이라고 했다. 또 “오펜하이머가 제안한 핵무기 국제 통제 계획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말했다. 냉전 체제의 희생양이자 핵무기 개발을 놓고 끝없는 고통이 이어지고 있는 우리나라를 의식한 말이다. 제목은 ‘미국의 프로메테우스’이지만 그의 후회와 회한은 우리에게 더욱 각별히 다가온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카이 버드·마틴 셔윈 지음, 최형섭 옮김/사이언스북스·4만원 ‘원자폭탄의 아버지’라 불리는 미국의 이론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1904~1967·사진)는 과학의 사회적 책임과 국가 권력과의 관계에 대해 깊은 고민거리를 던져준 논쟁적인 인물로 꼽힌다. 미국 정부의 원자폭탄 개발 프로젝트인 ‘맨해튼 프로젝트’를 주도했던 그는, 실제 원자폭탄이 투하된 뒤에는 핵무기의 위험성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다가 매카시즘의 광풍에 휩쓸려 추락했다. 언론인인 카이 버드와 대학 교수인 마틴 셔윈이 함께 쓴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는 25년 동안의 방대한 자료 조사와 인터뷰를 통해 오펜하이머의 일생을 섬세하게 되살려낸 전기다.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로버트 오펜하이머(1904~1967) 미국 이론물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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