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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어처구니 없는 이 굴레는 무엇인가

등록 2010-06-18 21:11

이명랑(37)
이명랑(37)
속절없이 당하기만 하는 상황들
아무리 애써도 벗어날 수 없고
해학적 문체로 극명하게 보여줘
〈어느 휴양지에서〉
이명랑 지음/뿔·1만1000원

이명랑(37)의 소설집 <어느 휴양지에서>는 제목에서 풍기는 인상처럼 느긋하고 편안한 책이 아니다. 그렇기는커녕 읽는 이를 시종 고통스럽게 만든다. 단편 여덟이 묶인 이 책의 표제작부터가 국가기관의 행정 실수 때문에 절망적으로 쫓기는 인물을 주인공 삼는다. 서른일곱 나이에 두 번째 입영 영장을 받은 그는 자신이 이미 군대에 다녀왔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동분서주하지만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하고 그예 입영 열차를 타고 만다.

<끝없는 이야기>의 마지막 장면에서 경찰서 출입기자 박은 컴퓨터 모니터를 통해 며칠 사이의 사건·사고를 확인한다. 술을 마신 운전자의 차가 편의점을 들이받는 바람에 젊은 여자 종업원이 숨진 사고, 60대 여성이 경찰서 화장실에서 극약을 먹고 자살한 사건, 20대 청년이 은행에서 통장 잔고 199원을 1원짜리 동전으로 달라며 소란을 피우다가 30만원 벌금형을 선고받은 사건 들을 훑어보던 박은 “또라이들…”이라는 한마디로 소감을 대신하고는, 마감에 쫓겨 그 사건들과 별다를 것 없는 기사 하나를 작성해 송고한다. 술 취한 20대 청년이 운전하던 오토바이가 편의점으로 돌진해 종업원이 크게 다쳤다는 기사였다.


〈어느 휴양지에서〉
〈어느 휴양지에서〉
사건 기자의 눈에 ‘또라이들’의 소행으로만 보이는 일들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것이 문학의 역할이라는 사실을 이 소설은 잘 보여준다. 사정을 알아보면 은행에서 소란을 피운 청년과 오토바이로 편의점을 들이받은 청년은 동일인이며, 60대 여성은 그 어머니, 편의점에 있다가 차에 치여 죽은 20대 여성은 청년의 동생이고, 그들을 이런 죽음과 사고로 몰아넣은 것은 한마디로 돈이다. 청년이 속임수에 넘어가 야식집을 인수했다가 돈을 날렸고, 그 돈의 일부는 여동생이 아르바이트를 해 가며 모았던 대학 등록금이었으며, 절망한 어머니는 자살해도 보험금이 나온다는 보험에 든 뒤 농약을 마셨고(그 농약은 몇 해 전 소를 키웠다가 망한 남편이 함께 마시고 죽자며 들고 왔으나 결국 남편이 먼저 죽는 바람에 겁이 나서 남겨두었던 것), 그렇지만 복잡한 보험 약관의 규정에 따라 결국 보험금은 타지 못하고 어머니의 통장 잔고 199원만이 청년의 몫으로 떨어졌으며, 화가 난 청년이 술을 마시고 ‘폭주’를 뛰다가 사고를 냈다는 것…. ‘병신 같은 게!’ ‘따르릉!’ ‘그냥 콱!’ ‘199원?’ ‘개소리하고 있네!’ ‘뭐 특별한 거 없나?’처럼 익살맞은 소제목들과 어처구니없는 상황들은 웃음을 깨물게 하지만 그 웃음은 커다란 슬픔과 고통을 바탕에 깐 웃음이어서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편의점에서 음주 운전자의 차에 치여 죽은 여성의 오빠가 다시 술에 취한 채 오토바이를 몰고 편의점으로 돌진한다는 식의 순환 구조는 가난한 이들의 고통이 돌고 돌기만 할 뿐 결코 끝나지 않으리라는 암울한 메시지를 던진다.

<황영웅 남근 사수기>에서 작가는 작정한 듯 해학적인 문체로 일관하는데, 여기서도 세상 물정에 어두운 주인공 황영웅과 그 가족들은 법이라는 이름의 괴물에게 속절없이 당하기만 한다. “그 무서운 법대로 해결하라니 꼼짝없이 죽으라는 말 아니오?”라는 황영웅 아내의 말은 가난하고 배운 것 없는 이들에게 법으로 대표되는 제도와 권력이 저승사자로나 인식된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안녕, 내 친구를 위한 왈츠>와 <부디, 아프지 마>에서도 등장인물들의 옹색한 처지는 여전하지만 그래도 한결 씩씩하고 따뜻한 분위기를 유지한다는 점에서 얼핏 선배 작가 공선옥의 소설들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부디, 아프지 마>에서 어머니가 딸들과 함께 마시는 쌍화탕은 <끝없는 이야기>에서 어머니가 들이켰던 박카스 병 속의 농약에 대비되면서 두 소설의 차이를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이명랑은 자신이 나고 자란 영등포 시장 사람들의 이야기로 작가 생활을 시작했다. 이번 소설집에 영등포 시장이 등장하지 않는 것은 작가의 생활 공간이 바뀐 데 따른 자연스러운 결과라 할 수 있겠지만, 그의 지난 소설들을 좋아했던 독자에게는 조금 섭섭하게 다가올지도 모르겠다. 작가는 “영등포가 직접 등장하지는 않더라도 이 책은 결국 그곳 출신 사람들의 이야기”라면서 “중국 동포들과 이주노동자들 이야기를 다음 장편으로 쓰기 위해 안산과 가리봉 등지로 열심히 취재를 다니고 있다”고 소개했다. 글 최재봉 기자 bong@hani.co.kr

사진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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