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민주화의 이념과 역사〉
영국·프랑스·독일 민주화경로 통해
주도이념과 이웃 이념들 관계 추적
주도이념과 이웃 이념들 관계 추적
〈유럽 민주화의 이념과 역사〉
강정인·오향미·이화용·홍태영 지음/후마니타스·1만6000원 정치 이념을 횡으로 자르면 단면 곧 구조가 드러나고, 종으로 자르면 형성 과정 곧 역사가 드러난다. 구조를 살피면 이념의 보편적 특성을 추출할 수 있고, 역사를 살피면 그 이념의 특수한 성격을 확인할 수 있다. 국내 정치학자들이 함께 쓴 <유럽 민주화의 이념과 역사>는 유럽 민주주의의 모델이라고 할 수 있는 영국·프랑스·독일의 민주주의가 각각 어떤 과정을 거쳐서 현재의 특성을 지니게 됐는지 그 역사를 살피는 연구서다. 특히 공화주의·자유주의·사회주의·보수주의 같은 이웃 이념들과 어떤 관계를 맺으면서 성숙했는지에 집중해서 그 연관관계를 추적한다. 정치학자 강정인(사진) 서강대 교수의 주도 아래 소장 정치학자 이화용(영국)·홍태영(프랑스)·오향미(독일) 박사가 해당 분야를 연구했다. 강 교수가 세 학자의 연구를 종합하여 서론을 집필하고 이어 각 지역의 민주화 역사를 고찰한 논문들을 묶었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영국·프랑스·독일의 민주화 역사를 이끈 주도 이념을 규명해 보려 했다는 점이다. 그 규명의 과정에서 영국과 프랑스는 각각 자유주의와 공화주의가 주도 이념 구실을 했음이 확인된다. 이와 달리 독일은 뚜렷한 선도 이념이 없었던 탓에 정치 과정에서 깊은 상처를 입었다고 이 책은 말한다. 20세기에 겪은 나치즘과 2차대전 패배 후의 분단이 그런 상처를 보여준다.
영국의 경우 민주화가 장기에 걸쳐서 점진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 기점을 잡기가 쉽지 않다. 1688년 명예혁명을 민주주의 시작으로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남성 보통선거권이 실현된 1918년을 민주화의 진정한 출발점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이 책은 이 두 관점을 절충해 19세기를 영국 민주화의 기점으로 삼는다. 이 시기에 차티스트 운동을 통해 영국 민주주의의 제도적 구현의 시동이 걸렸다. 중요한 것은 이 민주주의 흐름을 주도한 이념이 자유주의였다는 사실이다. 왕과 귀족이 중심이 된 국교회의 특권과 비국교도의 차별이 기본적인 대립 전선을 형성했고, 비국교도의 자유주의 운동이 반국교회 운동을 넘어 사회 전체에 대한 도전으로 확산됐다. 그리하여 19세기를 거치며 자유주의는 자유당과 보수당을 막론하고 거스를 수 없는 이념이 되었다. 자유당한테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보수당이 자유주의적 의제를 선점하기도 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 영국 정치의 주요 문법은 자유주의로 조형되었다.”
프랑스의 민주화 과정에서 주도 이념 구실을 한 것은 공화주의였다. 프랑스에서 ‘공화국’은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을 거쳐 제1공화국이 성립된 뒤로 격변기 때마다 정치적 목표로 등장했다. 그랬던 것이 1848년 2월혁명 이후 분위기가 급격히 달라졌다. 2월혁명에 이은 1848년 6월 파리 노동자 봉기로 ‘노동에 대한 권리’ 문제가 정치적 의제로 떠올랐고, 이 의제가 프랑스 정치 지형을 좌와 우로 갈라 놓으면서 ‘어떤 공화국인가’ 하는 좀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 것이다. “1848년 이전까지 ‘공화국’은 계몽주의적 종합으로서 사회적 삶의 문제에 대한 총체적인 답변의 의미를 지닌 것이었고, 2월혁명과 함께 바야흐로 프랑스는 그 답변을 현실에 실현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노동자 봉기는 ‘공화국’이 해답이 아니라 풀어야 할 숙제임을 보여주었다. 나폴레옹 3세의 권위주의 통치가 붕괴한 뒤 자유주의자와 공화주의자가 합세하여 1875년 세운 제3공화국은 ‘어떤 공화국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온건한 답변이었다고 이 책은 말한다. 이 온건 공화국 체제 아래서 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렸다. 프랑스 공화주의는 19세기 말 드레퓌스 사건에서 극우 내셔널리즘을 거부하고 ‘열린 민족주의’를 지향했으며, 사회주의 운동에서도 장 조레스 중심의 공화주의적 사회주의로 나아가 좌우를 아우르는 양상을 보였다.
반면에 독일에서는 뚜렷하게 주도적인 정치이념이 없었다고 이 책은 말한다. 소국으로 분열돼 있던 독일의 국가통합이 우선적 과제였기 때문에 자유주의를 비롯한 주요 정치 이념들이 독일 통일 문제 뒤로 밀렸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나마 선도적 이념에 가까운 구실을 한 것이 ‘사회민주주의’였는데, 독일 자유주의가 민족 통일 문제에 매달려 사회적 의제를 방치한 탓에 이 문제를 사회민주주의가 일찍이 떠맡았다. 독일 사회민주주의는 1차대전 종결 이후 바이마르공화국을 이끌었으나 강력한 구심력이 없었기 때문에 결국 1933년 나치당한테 권력을 빼앗기고 말았다.
이 책은 세 나라의 민주주의 역사가 현재의 정치에 끼치는 영향도 분석한다. 영국의 경우 자유주의가 주도한 탓에 신자유주의 물결이 몰아칠 때 급속하게 거기에 휘말린 데 반해, 프랑스는 공화주의, 독일은 사민주의의 힘으로 이 물결을 저지했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독일이 두 나라에 비해 민주화 과정이 부실했지만, 2차 대전 이후 민주주의 체제를 제대로 정착시켰고 그 결과로 더 나은 민주주의의 과실을 향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민주주의가 상처투성이 역사를 통해 오히려 더 풍요로워질 수도 있다는 진단인 셈이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강정인·오향미·이화용·홍태영 지음/후마니타스·1만6000원 정치 이념을 횡으로 자르면 단면 곧 구조가 드러나고, 종으로 자르면 형성 과정 곧 역사가 드러난다. 구조를 살피면 이념의 보편적 특성을 추출할 수 있고, 역사를 살피면 그 이념의 특수한 성격을 확인할 수 있다. 국내 정치학자들이 함께 쓴 <유럽 민주화의 이념과 역사>는 유럽 민주주의의 모델이라고 할 수 있는 영국·프랑스·독일의 민주주의가 각각 어떤 과정을 거쳐서 현재의 특성을 지니게 됐는지 그 역사를 살피는 연구서다. 특히 공화주의·자유주의·사회주의·보수주의 같은 이웃 이념들과 어떤 관계를 맺으면서 성숙했는지에 집중해서 그 연관관계를 추적한다. 정치학자 강정인(사진) 서강대 교수의 주도 아래 소장 정치학자 이화용(영국)·홍태영(프랑스)·오향미(독일) 박사가 해당 분야를 연구했다. 강 교수가 세 학자의 연구를 종합하여 서론을 집필하고 이어 각 지역의 민주화 역사를 고찰한 논문들을 묶었다.
정치학자 강정인 서강대 교수
이 책은 세 나라의 민주주의 역사가 현재의 정치에 끼치는 영향도 분석한다. 영국의 경우 자유주의가 주도한 탓에 신자유주의 물결이 몰아칠 때 급속하게 거기에 휘말린 데 반해, 프랑스는 공화주의, 독일은 사민주의의 힘으로 이 물결을 저지했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독일이 두 나라에 비해 민주화 과정이 부실했지만, 2차 대전 이후 민주주의 체제를 제대로 정착시켰고 그 결과로 더 나은 민주주의의 과실을 향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민주주의가 상처투성이 역사를 통해 오히려 더 풍요로워질 수도 있다는 진단인 셈이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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