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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열두쌍 열쇳말로 살핀 동아시아 정신

등록 2010-05-14 23:22

〈동아시아 미학〉
〈동아시아 미학〉
문질·성정·예악·중화·은현…
‘도’와 ‘예’에서 출발한 철학개념
시간 속에서 ‘미적 의미’ 더해져




〈동아시아 미학〉
리빙하이 지음·신정근 옮김/동아시아·3만2000원

리빙하이(중국 인민대 문학원 교수)가 쓴 <동아시아 미학>은 서양 미학의 위세에 밀려 한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동아시아 미학의 개념들을 기원에서부터 살피고 그 변천을 추적하는 연구서다. 책의 원제는 ‘주대 문예사상 개관’인데, 고대 중국 주나라 혼란기인 춘추전국시대에 형성된 미학적 개념을 열두 쌍으로 묶어 살핀다. 그리하여 이 책은 부제에 쓰인 대로 ‘동아시아 정신과 문화를 꿰뚫는 핵심 키워드 24’를 추출해 살피는 책이 됐다. 동아시아 정신의 뿌리가 춘추전국시대에 있다는 이야기다.

지은이가 뽑아낸 열두 쌍의 개념은 문질(文質), 성정(性情), 예악(禮樂), 중화(中和), 은현(隱顯), 충신(忠信), 형신(形神), 기미(氣味), 강유(剛柔), 동정(動靜), 청탁(淸濁), 허실(虛實)이다. 이 열두 쌍, 스물네 개념으로 동아시아 문예사상의 본질을 해부해 정리해 보는 것이 이 책의 내용이다. 옮긴이 신정근 성균관대 교수는 이 열두 쌍의 개념들을 우리말로 이해하기 쉽게 옮겨, 그 뜻이 분명히 드러나도록 했다. ‘중과 화’는 ‘들어맞음과 어울림’으로, ‘은과 현’은 ‘숨김과 드러냄’으로, ‘강과 유’는 ‘굳셈과 부드러움’으로, ‘동과 정’은 ‘움직임과 고요함’으로, ‘허와 실’은 ‘비어 있음과 차 있음’으로 각각 옮겼다.

이 책에서 가장 깊이 파헤치는 개념이 ‘문과 질’이다. 이 개념쌍을 알면 중국(동아시아) 문예사상의 뿌리를 아는 셈이 된다. 지은이는 ‘문과 질’의 의미를 세 가지 층위에서 살핀다. 먼저 ‘문과 질’은 ‘형식과 내용’을 뜻한다. 문(文)이 형식·현상·표면이라면, 질(質)은 내용·본질·실체다. 주나라 역사책 <국어>의 ‘노어’ 편에는 이 개념의 뜻을 알려주는 구절이 있다. “복식은 마음의 문(무늬)이다. 마치 거북 껍질에 구멍을 내어 불을 붙이면 반드시 문(무늬)이 밖으로 드러나는 것과 같다.”

공자(초상화)
공자(초상화)

‘문과 질’의 더 중대하고 의미 깊은 관계는 ‘꾸밈새와 본바탕’이라는 뜻으로 해석될 때 드러난다. 이 두 번째 의미를 겨냥하는 대표적인 말이 공자(초상화)의 가르침인 ‘문질빈빈’(文質彬彬)이다. <논어> ‘옹야’ 편에서 공자는 이렇게 말한다. “질(본바탕)이 문(꾸밈새)을 압도해버리면 촌스러워지고(거칠어지고), 문(꾸밈새)이 질(본바탕)을 압도해버리면 추해 보인다. 꾸밈새와 본바탕이 유기적으로 결합한 다음에야(문질빈빈), 참으로 모범적인 인물이라고 할 것이다.”

문과 질의 관계를 가장 간명하고도 고전적으로 정식화해 놓은 문장인 셈이다. 공자는 여기서 ‘본바탕이 꾸밈새를 압도한 상태’를 ‘야’(野, 거칠다·촌스럽다)라고 표현하는데, 공자의 제자 중에 자로가 이런 유형의 인물이라고 이 책은 설명한다. 공자는 자로에게 “거칠구나, 자로야!”라고 말한 적이 있다. <대대례기>라는 책에는 공자가 자로를 두고 “군건하고 씩씩하지만, 문(꾸밈새·예법)이 질(본바탕·천성)을 이기지 못하는구나!”라고 탄식한 것으로 나와 있다. 뒷날 청나라 학자 공광삼(1752~1786)은 이 대목에 대해 “이 부분은 자로가 용기를 앞세우고 본마음대로 거침없이 행동하여 아직 자신의 품성을 예악으로 꾸미지 않았다는 것을 말한다”고 주석했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문’은 우선 ‘예의’를 가리켰다.

따라서 공자가 말한 ‘문질빈빈’이란 인격이나 품행의 이상적인 상태를 묘사하는 말이다. 이 문질빈빈을 남송시대의 주희(주자)는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빈빈은 반반(班班)하다(반듯하고 아름답다)와 같은 뜻이다. 사물이 서로 뒤섞여 있으면서도 그 상태가 적절하고 균형이 잡힌 모양이다.” 이 책은 이렇게 여러 주석들을 두루 참조한 뒤에 ‘문질빈빈’이라는 말이 형식과 내용의 통일이라는 미학적 이상을 강조한 말이 아니었고, 처음에는 사람의 본바탕이 반드시 예법과 조화롭게 결합해야 한다는 도덕적·인격적 이상을 가리키는 말이었다고 설명한다. 다시 말해 “외재적인 예법으로 사람의 천성을 더 좋은 쪽으로 꾸미거나 고쳐서 바꾸는 것” 곧 도덕수양을 목표로 삼은 말이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먼저 도덕적 차원에서 사용되던 문질 개념은 차차 미학적 의미를 띠게 되는데, 그것이 세 번째 차원의 뜻인 ‘화려미와 소박미’다. 1세기 반표라는 사람이 사마천의 <사기>를 평한 말은 그 지점을 보여준다. “사물의 이치를 정연하게 잘 서술했다. 잘 분별하지만 화려하지 않고 질박하면서도 거칠지 않다. 문과 질이 서로 걸맞으니 실로 뛰어난 사관의 재주다.” 이런 미학적 차원의 문질은 과도해질 경우 폐단을 드러내기도 한다고 이 책은 말한다. “선명함·풍부함·우아함은 문의 범주에 속하는데, 그것들의 폐단은 화려함·번잡함·덧없음이다. 간소함·간결함·단아함은 질의 범주에 속하는데, 그것들의 폐단은 가벼움·현실적임·촌스러움이다. 문체가 너무 질박하면 글맛이 없고 문체가 너무 겉만 번지르르하면 내용을 해치게 된다.” 이렇게 먼저 예와 도의 차원에서 출발한 철학적 개념이 후에 미적 의미를 얻게 되는 것이 동아시아 미학의 특징이라고 이 책은 설명한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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