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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퓰리즘 민주주의 ‘병리현상’ 아닌 ‘필수요소’

등록 2010-03-17 20:08수정 2010-03-18 10:59

최근 서구 학계에선 포퓰리즘을 현대 정치의 병리적 징후로만 바라보던 전통적 관점에서 벗어나 ‘현대 정치의 일반화된 특성’이자 ‘민주주의의 필수불가결한 구성요소’란 차원에서 포퓰리즘을 재조명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사진은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가 절정에 달했던 2008년 6월10일 당시 인파로 가득 찬 서울 태평로 일대의 모습.  <한겨레21> 박승화 기자 <A href="mailto:eyeshoot@hani.co.kr">eyeshoot@hani.co.kr</A>
최근 서구 학계에선 포퓰리즘을 현대 정치의 병리적 징후로만 바라보던 전통적 관점에서 벗어나 ‘현대 정치의 일반화된 특성’이자 ‘민주주의의 필수불가결한 구성요소’란 차원에서 포퓰리즘을 재조명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사진은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가 절정에 달했던 2008년 6월10일 당시 인파로 가득 찬 서울 태평로 일대의 모습. <한겨레21>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지식인 사회 ‘포퓰리즘 다시보기’




4대강 포퓰리즘, 세종시 포퓰리즘, 교육 포퓰리즘, 등록금 포퓰리즘, 무상급식 포퓰리즘…. 무슨 말이든 ‘붙이는 족족’ 언표화돼 인구에 회자되니, 말 그대로 ‘언어의 인플레’가 따로 없다. 정견이 다른 상대방을 향해 언제든 ‘포퓰리스트’란 화살을 날려보낼 준비가 돼 있다는 점에서도 집권당과 야당, 좌파와 우파가 다르지 않은데, 이것이 한국사회에서 갖는 의미는 비교적 명확해 보인다. 포퓰리즘이란 상징이 좌파를 공격하기 위한 우파의 전유물이던 시대는 지났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한국에서 포퓰리즘은 여전히 ‘선동’과 ‘중우정치’, ‘대중영합주의’라는 부정적 정치현상을 일컫는 비난의 수사, 경멸의 언어로 통용된다.

서구학계, 부정적관점 벗어나 재조명
“기존 합의구조에서 배제된 소외층의
다양한 요구 관철시키려는 표현 의지”

눈여겨볼 대목은 포퓰리즘 이론의 진원지인 서구 학계가 최근 포퓰리즘을 현대 정치의 병리적 이상 징후로만 바라보던 관점에서 벗어나, ‘현대정치의 일반화된 특성’이자 ‘민주주의의 필수불가결한 구성요소’란 차원에서 새롭게 조명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는 점이다. 이런 흐름을 주도하고 있는 학자가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이론>으로 유명한 아르헨티나 출신의 포스트 마르크스주의자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오른쪽 사진)와 멕시코 출신의 소장 정치학자 벤자민 아르디티(왼쪽)인데, 포퓰리즘을 재해석한 이들의 문제작인 <포퓰리즘의 근거에 관하여>와 <자유주의 가장자리의 정치>가 각각 후마니타스와 그린비 출판사에서 출간을 기다리고 있다.


왼쪽부터 벤자민 아르디티, 에르네스토 라클라우
왼쪽부터 벤자민 아르디티, 에르네스토 라클라우
이들의 이론이 주목받는 것은 ‘인민에 대한 호소’나 ‘선동적 지도자에 의한 감성 자극 정치’를 포퓰리즘의 특성으로 규정해온 종래의 시도들이 20세기 말 본격화 된 정치지형의 변화 때문에 설득력을 잃게 된 상황과 무관치 않다. 냉전이 해체되고 좌·우파의 구분이 모호해지면서 대부분의 서구 정당은 전통적인 계급노선을 포기하고 국민 전체를 상대로 지지표를 구하는 대중주의 전략을 취하게 됐는데, 이에 따라 정책이나 논리보다는 수사와 이미지로 유권자의 감성을 움직이는 정치가 세력과 진영을 막론하고 각광을 받는 상황이 도래한 것이다. 실제 2008년 미국 대통령 선거 국면에서 오바마 진영이 취한 선거 전략이나 이후 금융위기 수습 국면에서 오바마 행정부가 펼친 정책들 역시 전형적인 포퓰리즘 양상을 띠고 있다는 데 이견을 다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렇다면 라클라우는 대체 포퓰리즘을 어떻게 정의하는가. 그의 포퓰리즘론은 “모든 정치는 기본적으로 포퓰리즘”이란 진술 안에 집약돼 있다. 그가 포퓰리즘을 정치와 동일시하는 것은, 포퓰리즘이 주어진 질서에서 소외되거나 배제된 이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그들을 새로운 정치적 주체로 구성하는 것을 목표로 삼기 때문이다. 요컨대 좌파든 우파든 그들이 추구하는 정치는 기존의 합의구조에서 밀려난 다양한 인민의 요구를 관통하는 통일된 슬로건을 제시하고, 이를 통해 그들을 기존 질서에 대항하는 정치 주체로 맞세우는 전략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다를 게 없다는 얘기다. 이런 포퓰리즘의 세 가지 유형으로 라클라우는 아르헨티나의 페론주의와 미국 인민당, 터키의 케말 파샤를 꼽는데, 이들은 각각 좌와 우, 중도파의 포퓰리즘을 대변한다.

책을 번역한 임승준 인권의학연구소 연구원(정치학 박사)은 “라클라우의 저작은 대표작인 <사회주의와 헤게모니 전략> 이후 자신의 오랜 이론활동을 마무리하는 작업으로, 소외된 대중을 정치적 주체로 구성하는 포퓰리즘이 일탈이나 비정상이 아니라 모든 정치 행위를 관통하는 근원적 특성임을 보여주는 중요한 저작”이라고 평가한다.

반면 아르디티는 포퓰리즘을 ‘민주주의의 증상’으로 이해한다. 여기서 ‘증상’이란 개념은 프로이트에게서 빌려온 것인데, 자아의 형성을 위한 본능의 억압과정에서 만들어지는 ‘대리표상’이자 ‘내부의 주변부’ 같은 것이다. 요컨대 포퓰리즘이란 민주주의에 이질적인 어떤 것이나 적대적 타자가 아니라, 민주주의에 속하면서 동시에 민주주의에 불안과 소요를 일으키는 ‘민주주의의 내적 주변부’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아르디티의 판단 근거는 민주주의에 내장된 이중성이다. 민주주의는 일상적으로는 정치인·관료 등 전문가 집단에 의해 관리되고 운영되지만 동시에 선거라는 대중의 직접 참여를 통해 자신의 정당성과 작동 근거를 확보해야 한다. 이 때문에 민주주의는 정치의 영역 안으로 주기적으로 대중의 개입을 초래하게 되는데, 이런 이중성이야말로 포퓰리즘의 존재론적 뿌리가 된다는 게 아르디티의 견해다. 따라서 민주주의가 이 두 측면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포기하지 않는 한, ‘인민 의지의 직접적 표현에 대한 열망’으로서 포퓰리즘은 민주주의에서 결코 사라질 수 없다고 아르디티는 단언한다.

그러나 이들의 포퓰리즘 재해석 역시 약점은 있다. 진태원 고려대 연구교수는 “라클라우의 재해석은 포퓰리즘을 정치 일반과 무리하게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며 “이 경우 포퓰리즘이 아닌 것은 정치가 아니라거나, 좌파의 포퓰리즘이 극우파의 포퓰리즘(심지어 파시즘)과 아무런 차이도 갖지 않는다는 결론으로 이어질 위험이 있다”고 꼬집는다. 하지만 이런 약점에도 불구하고 ‘포퓰리즘 다시보기’가 오늘의 변화된 지형에서 갖는 정치적 의미는 반감될 수 없다고 진 교수는 말한다. 가난한 이들을 정치의 영역에서마저 추방하고 배제하는 신자유주의의 ‘반(反)정치’가 지속되는 한 포퓰리즘에 드리운 어둠과 비합리의 그늘을 걷어내려는 사상적·이론적 신원작업 역시 꾸준히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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