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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그림은 말한다 ‘가족의 역사’를

등록 2010-01-15 21:23

〈가족을 그리다〉
〈가족을 그리다〉
식민지·전쟁·산업화 격랑 속
붓질로 표현된 가족이데올로기




〈가족을 그리다〉
박영택 지음/바다출판사·1만3800원

두 점의 그림이 있다. 반세기의 시차를 두고 그려졌다. 먼저 배운성의 1935년작 <가족도>. 식민지시대의 대표적인 가족화로 꼽힌다. 안마당과 대청마루에 앉고 서고 도사린 3대의 일가족이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각 인물의 개별 사진들을 모본 삼아 그린 일종의 ‘합성그림’인데, 단체 가족사진에서처럼 구성원 간 위계질서가 강조돼 있다. 집이 배경에 그치지 않고 사람들을 ‘품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또 하나의 그림은 안창홍이 1982년에 그린 <가족사진>이다. 한 사람은 앉고 두 사람은 서 있는, 스튜디오 사진의 전형적인 구도다. 특이한 것은 인물의 얼굴이다. 가면을 씌워놓은 듯 표정 없는 흰색의 안면 위로 동굴처럼 검게 뚫린 눈과 입. 인물들이 차려입은 식민지 시대 풍의 정장들과 어우러져 기괴하고 섬뜩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배운성의 1935년작 <가족도>
배운성의 1935년작 <가족도>

미술평론가 박영택씨가 쓴 <가족을 그리다>는 한국의 근현대사 속에서 가족이라는 원초적 공동체가 겪었던 가파른 변화가, 가족을 시각적으로 재현하는 회화양식(가족화)에는 어떤 형태로 투영되어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 과정은 한국회화의 상투화된 모성 이미지와 단란한 가족상에 담긴 가부장 이데올로기를 폭로하면서, 식민지와 전쟁이란 극단의 체험이 남겨놓은 트라우마와 대면하고, ‘시공간 압축’으로 표현되는 사회변화의 급진성이 작가들의 미적 표상체계에 야기한 동요와 균열을 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가족이란 공동체가 겪은 변화가 가팔랐으니 가족을 형상화한 그림들 역시 현기증 나게 변하기는 마찬가지다. 배운성과 안창홍의 그림이 보여주는 것도 이것이다. 조부모-부모-자녀 세대로 구성된 17명의 대가족이 등장하는 배운성의 그림은 혈통을 중시하는 전통의 가족의식뿐 아니라, 치밀하게 고려된 인물 배치와 자세를 통해 ‘효’라는 가족 이데올로기를 은밀하게 드러내는 작품이다.

안창홍이 1982년에 그린 <가족사진>
안창홍이 1982년에 그린 <가족사진>
하지만 이런 대가족은 식민지 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급속히 사라진다. 이런 점에서 글쓴이는 배운성의 그림을 “점차 망실되어 가는 도정에 위치한 불안한 가족의 얼굴”이자 “거의 마지막 잔해처럼 간직된 대가족의 초상”이라 부른다. 전통의 대가족이 더 이상 지탱불가능한 현실이 되어버렸음을 감지한 데서 비롯된 불안과 안타까움이, 모든 구성원(개까지도 포함된)이 집이라는 ‘절대공간’에 철저하게 녹아든 완벽한 구도의 합성그림을 낳았다는 얘기다.

47년 뒤 안창홍의 그림에 등장하는 것은 부모와 외아들로 구성된 3인 가족이다. 여기서 집은 배경으로조차 등장하지 않고, 피사체가 된 인물들에선 일말의 생명감도 느껴지지 않는다. 글쓴이는 이를 두고 “가족의 해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이미지”라 규정한다. 과거의 가족 이미지가 한결같이 따뜻하고 평화로운 장면을 연출하는 것으로 상투화됐다면, 안창홍의 작품에선 그로부터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본격화한다는 것이다.

이 그로테스크한 작품에는 어머니의 가출과 아버지의 재혼이라는 작가의 비극적 가족사가 녹아 있다. 하지만 그 개인사가 시각화되어 관객 앞에 노출되는 순간, 작품은 병든 사회를 살아가며 허깨비가 되어버린, 더는 이상적인 삶의 모델로 인정받지 못하는 “죽어버린 가족의 기념비”가 된다.

책은 이와 함께 한국전쟁이 야기한 죽음과 이산의 아픔, 산업화의 격랑 속에서 가속화하는 가족의 해체, 1990년대 본격적으로 싹튼 근대 가족제도에 대한 비판과 반성이 작가의 심미적 자의식 안에 어떻게 녹아들었고, 또 어떤 형태의 작품으로 형상화돼 있는지를 장욱진, 이중섭, 박수근, 이왈종, 이만익, 임옥상, 오윤, 방정아, 김옥선, 백지순 등의 사례를 통해 생생히 드러낸다.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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