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건
1930년대 진보 문학이론가…동남아 연구 등 행적 밝혀져
‘한류’가 있기 전 ‘월류’(越流)가 있었다. 국권 상실의 위기감이 높아가던 20세기 초, 베트남의 식민화 과정을 다룬 <월남망국사>는 조선 지식인의 필독서였다. 월류가 다시 밀려든 것은 1930년대였다. 일본의 식민 통치가 20년을 넘기던 시절, 희망에 목마른 지식인들은 동병상련의 약소민족이 보여준 불굴의 투쟁에서 위기를 헤쳐나갈 용기와 지혜를 얻으려 했다. 당시 베트남과 동남아시아 동향을 국내에 소개한 연구자 가운데 한 명이 김영건(사진)이었다.
그러나 김영건에 대해선 해방 후 임화, 이원조, 김남천 등과 함께 좌익 문단을 대표하는 문학이론가로 활약했으며 1949년을 전후해 행방이 묘연해졌다는 것, 해방 전에는 베트남과 일본에 머무르며 국내 신문과 잡지에 ‘안남통신’ ‘안남유기’ 등 베트남 관련 기고문을 연재했다는 것 말고 알려진 사실이 많지 않다. 윤대영 인하대 한국학연구소 연구원이 최근 <동남아시아연구>에 쓴 ‘김영건의 베트남 연구 동인과 그 성격’은 베일에 가려져 있던 김영건의 출생과 성장 과정, 동남아 연구에 뛰어들게 된 경위와 좌익 문학이론가로의 변신 배경 등을 식민지 지식인이 겪어야 했던 굴곡진 삶의 프리즘을 통해 규명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윤 연구원이 밝혀낸 것은 1910년생인 김영건이 총독부 중추원 촉탁이었던 부친을 따라 황해도 해주에서 경성으로 이주했으며, 경성 제2고보(현 경복고)를 졸업한 뒤 당시 동아시아학의 중심지였던 베트남 하노이의 프랑스 원동학원에서 사서 겸 연구원으로 일했다는 사실이다. 윤 연구원은 “김영건이 원동학원에서 일하기 전 프랑스에 유학했다는 설이 있지만 증거는 없다”며 “확실한 건 그가 1931년부터 원동학원에서 일했으며 이듬해 일본도서실 사서로 정식 고용됐다는 사실”이라고 밝혔다.
원동학원에서 보낸 10년은 김영건의 연구가 ‘베트남학’에서 ‘동아시아학’으로 확장되는 계기가 된다. 윤 연구원은 “1941년 김영건은 ‘남양과 열국의 경제적 활동’이란 논문에서 태국과 인도차이나, 포르투갈령 티모르, 네덜란드령 제도의 경제상황을 식민 모국의 정책에 따라 비교·검토해 동남아 지역에 대한 통합적 접근을 시도하기에 이른다”며 “해방공간의 격랑에 휩쓸리지 않았더라면 동아시아학 분야에 뚜렷한 족적을 남길 수 있었을 것”이라며 아쉬워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김영건의 학문 세계 안에서 ‘조선학’의 정립에 대한 고민이 싹트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윤 연구원은 “해방공간의 격동 속에서도 김영건은 체계적 조선학의 필요성에 대한 선구적 인식을 보여준다”며 “1947년 글에서는 조선학 발전을 위한 필요조건으로 조선에 관한 외국 자료의 수집과 함께 영어·프랑스어·독일어·러시아어·네덜란드어 등 외국어 지식의 연마를 제안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에 대해 최병욱 인하대 교수는 “암울했던 식민지 시기에 동아시아 연구의 세계적 중심지에서 활발한 학문활동을 벌인 한국인이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며 “21세기 ‘김영건의 재발견’은 학계가 고민하는 한국학의 세계화와 관련해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고 평가했다.
1949년 이후 김영건의 행적은 아직 드러나지 않고 있다. 한국전쟁 기간 중 처형됐다거나 월북했다는 얘기가 떠돌았지만 확인된 바 없다. 일각선 “남양으로 가고 싶다”는 1948년 <어록>의 한 구절을 근거로 베트남·프랑스 밀항설을 제기하기도 한다.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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