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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등록 2009-12-11 20:19수정 2009-12-11 20:35

‘남한 땅 3대 구라’ 백기완 자전적 이야기집
예전 피 끓던 청춘들, 지금은 다 어디에…




발터 베냐민이 그랬다. “이야기꾼은 자기 삶의 심지를 이야기의 불꽃으로 완전히 연소시키는 사람이다.” 백기완(76·사진) 통일문제연구소장은 이런 이야기꾼의 정의에 누구보다 꼭 들어맞는 사람이다. 그는 ‘남한 땅 3대 구라’의 한 명으로 불릴 만큼 빼어난 이야기 솜씨를 자랑해왔는데, 그 공인받은 입심의 원천으로 사람들은 현대사의 굴곡이 고스란히 인각된 그의 70여년 생애를 지목하곤 한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한겨레출판)는 삶이 곧 이야기였던 이야기꾼 백기완의 자전적 이야기집이다. 구월산 자락을 누비던 황해도 맨발소년이 축구선수가 되겠다는 일념에 무작정 상경한 뒤 해방과 전쟁을 겪으며 사회와 역사에 눈 뜨고, 이승만·박정희·전두환 독재를 거치며 통일·민중운동의 거목으로 성장하기까지 격정과 분노, 환희와 좌절의 나날들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29일 서울 인사동에서 만난 백 소장은 “날이 밝자마자 이슬처럼 사라질 운명의 책”이라고 멋쩍어했다.

“사실 쓰고 싶지 않다고 꽁무니를 뺐어. 나를 키운 건 밥도 아니고 글묵(책)도 아냐. 좌절과 절망이 나를 키운 거야. 그러다보니 몸뚱이가 어떻겠어? 온전치 못하고 한쪽으로 기우는 게 당연해. 이걸 글로 옮기려니 난들 편했겠어?”

그의 말대로 책에는 슬픔과 고통의 흔적들이 가득하다. 명절에도 곡식이 없어 군불만 때던 어릴 적 이야기며, 남산 숲에 숨어 있다 등교하는 학생들 도시락을 뺏어 먹던 ‘눈물의 주먹’으로 불리던 10대 시절, ‘달동네’란 우리말을 지어 불렀다가 일본말 안 쓰는 빨갱이로 몰려 천장에 매달린 기가 막힌 사연 등이 그렇다. 시국사건으로 체포령이 떨어져 잠행하던 시절, 강원도 어촌의 수배자 전단지에서 큰딸(백원담 성공회대 교수)의 얼굴을 발견하고는 굵은 눈물을 쏟은 사연 등에선 가족에 대한 미안함과 애틋함이 묻어난다. 장준하·문익환 등 유명을 달리한 지인들, 뒷날 대통령과 장관, 고위 정치인으로 행로가 갈린 옛 동지들과의 각별했던 인연 역시 시선을 붙든다.

좌절·고통의 인생역정 잊힌 우리말로 살려내
해방사상 정리 ‘절박감’…“죽기살기로 버텨”


고유명사를 제외하곤 모든 어휘를 순우리말로 풀어쓴 대목 또한 인상적인데, 그중에는 ‘맞대’(대답), ‘고칠데’(병원), ‘오랏꾼’(경찰) 처럼, 그 뜻을 짐작할 수 있는 말들도 있지만 ‘랭이 날래 듬직’(민중해방 사상), ‘검뿔빼꼴’(제국주의)처럼 의미를 종잡을 수 없는 것들도 있다. 사용하지 않아 잊혀진 우리말을 찾아낸 것도 있지만, 신조어나 전문용어의 경우엔 백 소장이 직접 만든 것도 적지 않은 탓이다. “그늘에 가려지고 땅에 묻히고, 그런 무지랭이 말들이 엄청나게 많아. 우리말 사전이란 게 있지만 바닷가에서 모래 한 줌 쥔 것처럼 부실하기 짝이 없어. 나는 그런 말들을 찾아내고, 없으면 빚어내려고 했어.”

근황을 묻자 “죽기 아니면 살기로 버티는 중”이라고 했다. 눈뜨면 들려오는 소식이 못내 불편하고 못마땅하지만, 나이를 핑계 삼아 뒷방에 물러앉을 수는 없다는 얘기다. 그래서 틈날 때마다 글을 쓴다고 했다. 우리 옛이야기 안에 담긴 민중해방 사상의 뿌리를 남은 생애 동안 정리해둬야 한다는 절박감 때문이다. “사실 우리처럼 옛날얘기를 좋아하는 민족이 흔치 않아. 신화, 전설, 설화 그런 거. 사랑방에 모여 나누던 이야기들. 나라도 기록하지 않으면 영영 사라져버릴 거 같단 말이지.”

그는 자신의 책을 지금의 10대나 대학생 세대들보다는 20~30년 전 거리를 함께 누비던 중·장년 세대가 읽어주면 좋겠다고 밝혔다. 그들은 <자주고름 입에 물고 옥색치마 휘날리며>나 <장산곶매 이야기> 등의 책을 통해 ‘운동가 백기완’보다 ‘이야기꾼 백기완’을 먼저 만난 세대이기도 하다.

“그때 내 이야기를 듣고 발을 구르던, 내 ‘옥색치마’를 읽고 눈물 흘리던 젊은이들, 지금 다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거야? 우리 이 책 읽고 같이 소리 내어 엉엉 울어보자 이거야.”

글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사진 이정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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