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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외부에 의한 사유’를 사유하라

등록 2009-12-04 19:50

〈외부, 사유의 정치학〉
〈외부, 사유의 정치학〉
‘철학의 외부’ 이진경 교수 집필
‘외부’ 범주로 현대 사상 흐름 개괄
“본성은 관계에 의해 달라진다”




〈외부, 사유의 정치학〉
이진경 지음/그린비·1만6900원

<외부, 사유의 정치학>은 ‘외부’라는 사유 범주를 통해 현대의 사상 흐름을 개괄한 책이다. 애초 인문사회과학의 핵심 용어를 풀어서 소개하는 ‘개념어 총서’로 기획됐으나, 개설서 수준을 뛰어넘는 녹록잖은 난이도 탓에 편집 과정에서 단행본으로 운명이 바뀌었다. 7년 전 <철학의 외부>라는 책에서 ‘외부의 사유’라는 낯선 사유 방식을 선보였던 이진경 서울산업대 교수가 안식년을 맞아 체류중인 일본에서 썼다.

유념해야 할 점은 글쓴이가 말하는 ‘외부의 사유’는 ‘외부에 대한’ 사유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외부에 의한’ 사유로, 어떤 대상이 갖는 성질은 ‘뜻하지 않았고, 뜻대로 되지도 않는’ 외부와의 우연적 만남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인식에 근거한다. 이런 외부의 사유는 글쓴이가 볼 때 서양 철학사에서도 주변적 지위를 벗어나지 못했는데, 전통적으로 철학은 확실한 것, 항상적인 것, 초월적인 것을 추구하는 ‘내부성의 사유’를 특징으로 삼아왔기 때문이다. 이 점은 확고한 진리 인식의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외부 세계에 대한 경험적 인식을 포기했던 데카르트나, 진리 인식의 근거를 인간의 선험적 사유 형식에서 찾았던 칸트, 세계는 정신이 외화된 것이라 선언함으로써 외부 자체를 제거해 버린 헤겔에게서 두드러진다.

글쓴이가 볼 때 이런 내부성의 철학에 균열을 가져온 것은 19세기 유물론과 하이데거의 존재론이다. 유물론이 ‘물질’이란 개념을 통해 정신이나 의식으로 환원될 수 없는 외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환기시켰다면, 하이데거는 친숙한 세계에 길들여진 ‘세계-내-존재’로서의 인간이 ‘불안’이라는 외부와의 만남을 통해 존재의 진정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는 사실에 주목함으로써, 외부의 틈입이 갖는 중요성을 일깨웠다는 얘기다. 이후 외부의 사유는 두 개의 경로를 따라 진행되는데, 하나가 소박한 실재론적 유물론에서 역사적 유물론으로 나아가는 흐름이라면, 다른 하나는 하이데거에서 레비나스, 블랑쇼를 거쳐 푸코, 들뢰즈로 이어지는 흐름이다.

마르크스, 하이데거, 블랑쇼, 푸코, 들뢰즈(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마르크스, 하이데거, 블랑쇼, 푸코, 들뢰즈(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이런 복수의 흐름 속에서 글쓴이가 주목하는 인물이 블랑쇼다. “외부라는 말에 사유의 무게를 부여”함으로써 푸코, 들뢰즈로 이어지는 ‘타자의 정치학’을 예비했기 때문인데, 그에게 외부란 “보이던 것을 보이지 않게 만듦으로써, 보이지 않던 것을 보게 만드는 무엇”이다. 이를테면 그것은 푸코가 말하는 ‘광기’ 같은 것이다. 이성이 자신의 합리성을 확보하고 정상성을 확인하기 위해 타자화하고 배제하고 유폐시켜 온, 이성의 ‘외부’이자 ‘타자’로서의 광기.

푸코를 지나 들뢰즈로 오면 ‘외부’는 ‘내재성’ 개념과 연결된다. 내재성은 내적 본질을 뜻하는 ‘내부성’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초월성’과 대비되는 개념으로, 글쓴이에 따르면 “어떤 것도 불변의 본성 같은 것은 없으며 그것과 관계돼 있는 것, 다시 말해 그것의 외부에 따라 본성이 달라진다”는 관점을 내포한다는 점에서, 외부에 의해 사유하는 것이다.

이런 외부에 의한 사유의 대표적 사례로 글쓴이가 지목하는 것이 마르크스의 역사 유물론이다. 이 점은 “흑인은 흑인이다. 특정한 관계 속에서만 그는 노예가 된다”는 마르크스의 진술 안에 집약돼 있는데, 흑인을 노예로 만드는 것은 흑인의 내적 본성이 아니라, 그가 만나고 접속하는 백인의 총과 족쇄라는 얘기다. 달리 표현하면, 어떤 ‘실체’로서의 내적 본성 같은 것은 없으며, 본성이라는 불리는 것은 그것이 접속하는 외부(관계들)에 의해 달라진다는 것이다. 이것의 정치적 메시지는 명확하다. 지금 확고해 보이는 것, 불변의 본성처럼 보이는 것도 그것을 둘러싼 외부를 변화시킴으로써 달라지게 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이 지점에서 ‘외부에 의한 사유’는 ‘혁명의 사유’로 전환한다.

‘정치철학에서의 외부성의 문제’라는 이름이 붙은 책의 2부에서는 아렌트의 ‘폴리스의 정치학’에서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와 랑시에르의 ‘불화의 정치학’에 나타난 외부성 문제가 다뤄진다. 개념의 미로를 헤쳐나가는 게 적이 부담스러운 독자라면 2부를 먼저 읽어도 무리는 없다.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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