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5년 신라와 당이 매소성(지금의 경기 연천군 청산면) 일대에서 벌인 전투장면 기록화. 현행 국사 교과서는 이 전투와 1년 뒤에 벌어진 기벌포 해전에서 승리함으로써 신라가 당 세력을 한반도에서 축출하고 마침내 삼국통일을 완수했다고 기록한다. 신라의 통일 시점을 고구려 멸망(668년)이 아닌 나당전쟁 승리로 잡고 있는 것이다.
김흥규·윤선태 교수 논쟁
윤선태 “일 역사학자 담론 발명해 계승”
김흥규 “과잉 해석…7세기 말부터 존속”
윤선태 “일 역사학자 담론 발명해 계승”
김흥규 “과잉 해석…7세기 말부터 존속”
‘통일신라’를 둘러싼 역사 논쟁이 점입가경이다. 김흥규 고려대 교수가 지난 9월 계간 <창작과 비평> 가을호에 쓴 ‘신라통일 담론은 식민사학의 발명인가’라는 글이 도화선이었다. 여기서 김 교수는 오늘날 통용되는 통일신라 담론이 일본 근대 역사학의 도움으로 ‘발명’됐다는 윤선태·황종연 동국대 교수의 주장에 대해 “근대와 식민주의를 특권화하고 역사 이해를 부당하게 단순화한다”고 비판했다. 그런데 당사자 중 한 명인 윤선태 교수가 이번주 발간된 <창작과 비평> 겨울호에서 김 교수 글을 조목조목 반박한 것이다. 그런데 양쪽의 공방이 실증과 논리에만 의존해 진행되지 않는다는 점이 개운찮다. 오독과 과장에 의도적인 뭉개기, 모멸감을 주려는 듯 잔뜩 비틀고 날을 세운 언어들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탓이다.
문제가 된 ‘통일신라 발명론’은 윤 교수가 2007년에 쓴 ‘통일신라의 발명과 근대역사학의 성립’에서 개진한 주장이다. 핵심은 삼국통일의 완수 시기를 신라가 나당전쟁에서 승리한 때(676년)로 보는 오늘날의 통일신라 담론이 일본 역사학자 하야시 다이스케가 1892년에 쓴 <조선사>(朝鮮史)에 처음 등장했으며, 이후 구한말의 국사 교과서에 수용된 뒤 식민지 시대 민족주의 사학에 계승되면서 오늘날의 공식 역사해석으로 자리잡았다는 것이다.
윤 교수가 볼 때 하야시의 주장은 신라의 통일 시점을 백제·고구려 멸망기(668년)로 설정했던 한국의 전통 역사서에 견줘 완전히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 한반도의 첫 통일국가가 ‘중국이라는 타자’와의 대결 속에서 성취됐다는 상상의 여지를 열어줌으로써 ‘국민’ 형성의 기초가 되는 공통적 역사인식의 원형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야시는 왜 이런 담론을 ‘발명’했을까. 윤 교수는 이것이 청으로부터 조선의 독립을 추구했던 당시 일본의 아시아연대주의와 연결돼 있을 것이라고 본다.
김 교수는 이런 윤 교수의 주장이 하야시의 역사 기술에 대한 과잉 해석에서 비롯된 오류라고 본다. 하야시가 삼국 통일에 대해 기술한 대목 어디에도 ‘신라가 당과의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통일을 완수했다’는 내용은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김 교수는 통일 과정에 대한 하야시의 기술은 나당의 대립을 ‘전쟁’이 아닌 ‘소규모 충돌’로 묘사하면서 신라의 영토 점유를 적극적 투쟁이 아닌 절취의 결과로 축소하고 있으며, 내용 자체도 <삼국사기>를 차용한 것으로 <삼국사절요> <동국통감> 같은 후대의 역사서에 반복해서 등장한다고 역공한다.
실제 윤 교수가 인용한 <조선사>에는 신라의 통일 과정에 대해 나당이 연합해 백제·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당이 그 땅에 도독부를 설치했지만 신라가 점점 백제 땅을 취하고 고구려 반중(叛衆)을 거둬들여” 당의 분노와 침략을 초래했고, “신라 왕이 거짓으로 사과하나 마침내 고구려 남쪽 경계까지 주군을 설치했다”고 기술한 것이 전부다. 어디에도 ‘신라의 승리’나 ‘통일’의 완수 시점에 관한 이야기는 없다는 말이다.
윤 교수는 이런 비판에 대해 “김흥규는 역사가 어떻게 구성되는지를 전혀 모른다”며 격한 감정을 드러낸다. 통일에 대한 하야시의 기술이 김부식의 <삼국사기>나 후대의 여러 사서에 등장하는 기술과 같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에 대한 해석에선 김부식이나 다른 사가들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김부식 등이 “사대질서에 함몰된 유학자였기 때문에 나당전쟁의 승리를 통해 삼국통일이 완성되는 것으로는 상상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당에 항거했기 때문에 통일의 공훈마저 망치게 됐다고 비판”한 반면, 하야시는 당 세력의 대척점에 신라뿐 아니라 백제·고구려의 유민까지도 포착해 배치함으로써 전혀 다른 상상에 기반한 새로운 역사를 구성하고 있다는 게 윤 교수의 해석이다.
결국 쟁점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신라가 당 세력을 축출함으로써 통일이 달성됐다는 오늘날의 “자명한” 삼국통일 담론이 대체 언제 처음 등장했느냐는 것이다. 김 교수는 “삼국통일 담론이 7세기 말의 신라에서 형성돼 조선후기까지 여러 차례 재편성과 전위 과정을 거치면서 동적으로 존속해왔다”고 이야기할 뿐, 현행 국사 교과서의 ‘당 축출 기점론’이 구체적으로 언제 등장했는지에 대해선 침묵한다. <조선사>가 최초라는 윤 교수 주장도 불완전하긴 마찬가지다. 하야시가 ‘백제·고구려의 멸망’과 ‘신라의 통일’을 별개의 장으로 분리해 기술했다는 사실, <조선사>의 집필에는 “아시아연대주의의 영향 아래서, 조선을 청국으로부터 독립시켜야 한다는 당시 일본 지식인의 굴절된 희구가 담겨 있다”는 윤 교수의 추정 말고는 주장을 입증할 만한 뚜렷한 근거가 눈에 띄지 않는 탓이다.
물론 적극적인 분발이 요구되는 것은 김 교수 쪽이다. 어찌됐든 윤 교수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정황 증거는 제시한 셈이기에, 확실한 반증을 통해 그의 오류를 증빙해야 할 책임은 처음 문제를 제기한 김 교수에게 있기 때문이다.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김흥규·윤선태 교수 논쟁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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