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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명나라의 파병요청…조선은 실리를 택했다

등록 2009-11-12 21:42

‘조선시대 해외파병과 한중관계’ 쓴 계승범 교수
‘조선시대 해외파병과 한중관계’ 쓴 계승범 교수
‘조선시대 해외파병과 한중관계’ 쓴 계승범 교수
1479년(성종 10년) 명으로부터 건주여진에 대한 협공을 요청 받은 조선은 파병 여부를 두고 신료들의 의견이 엇갈렸다. 찬성론자는 ‘대국을 섬기는 예의상 거절하기 어렵다’는 입장이었고, 반대론자는 어려운 경제사정과 패전 가능성을 들어 불가함을 역설했다. 판세를 가른 것은 때마침 올라온 정효종이란 하급관리의 상소였다.

“맹자께서 말씀하시길 이웃 마을에 싸움이 있으면 문을 닫아걸어도 괜찮다고 했습니다. 혹 황제의 명을 중히 여겨 부득이 (파병 요청에) 응해야 한다면 봄날의 화창한 때를 기일로 삼을 것을 청하고, 중국이 기일에 앞서 단독으로 정벌에 나선다면 우리 백성은 전쟁에 나가는 수고를 겪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요청엔 응하되 ‘시간끌기’ 면피용 파병”
15차례 논쟁 통해 대외인식 통사적 접근
“명-청 교체기 오늘날 동아시아와 유사”

조정이 마련한 최종안은 이랬다. 병력 요청에는 응하되 최대한 시간을 끌고, 군대가 가더라도 충돌은 가능한 한 피한다는 것. 사실상의 ‘면피용 파병’이었다.

“당시 논쟁을 보면 ‘남의 싸움에 끼어들어 피해 볼 이유가 뭐냐’는 신중론과 ‘어차피 보낼 거 화끈하게 결행해 명의 환심이라도 사 두자’는 적극적 파병론이 충돌합니다. 심지어 ‘유림과 백성의 반대 여론을 내세워 파병 규모를 줄여보자’는 협상론 등 나올 수 있는 논리가 다 나와요. 어떻습니까, 참여정부 시절 이라크 파병을 두고 벌어진 논쟁 구도와 흡사하지 않습니까?”

계승범 고려대 연구교수(민족문화연구원)가 쓴 <조선시대 해외파병과 한중관계>(푸른역사)는 파병 논쟁이란 프리즘을 통해 조선의 대외관계, 나아가 지배 엘리트의 대중(對中)의식이 겪은 변화상을 추적한 책이다. 파병이라는 단일 이슈를 매개로 조선의 외교관계와 대외인식에 통사적으로 접근한 첫 시도인 셈이다.

“17세기 나선정벌에 관해 논문을 쓴 것을 계기 삼아 실록에 나온 해외파병 논쟁을 정리해 봤더니 무려 열다섯 차례나 되는 겁니다. 첫 번째가 1449년(세종 31년) 명의 몽골 원정 요구였고, 마지막이 1658년(효종 9년) 남하하는 러시아 세력을 막기 위한 청의 출병 요청입니다.”


계 교수의 분석으로는 이 가운데 거절한 것이 5차례, 파병한 게 9차례였고, 취소가 1차례다. 중요한 사실은 16세기를 분수령으로 논쟁의 양상에 큰 변화가 찾아온다는 점이다.

“성종 때까지만 해도 중원 제국(명)에서 파병 요청이 들어오면, 신료들끼리 모여 주판알을 튕깁니다. ‘대체 이 전쟁에 참여해 얻을 수 있는 게 뭐냐’를 따지는 거죠. 그래서 별 볼 일 없으면 거절해 버리고, 그게 어려우면 마지못해 생색내기 차원에서 군대를 보냅니다. 적어도 ‘국익’과 ‘사대’를 동일시하진 않았다는 얘깁니다. 그런데 16세기를 지나면서 두 가지가 동일시됩니다. 명의 요청을 따르는 것 자체가 국익으로 둔갑하는 것이죠.”


〈조선시대 해외파병과 한중관계〉
〈조선시대 해외파병과 한중관계〉
대체 16세기에 어떤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계 교수는 쿠데타를 통해 옹립된 중종이 명에 대한 사대를 통해 정통성을 획득하려 했던 점, 이 시기 주자학이 통치 이데올로기로 확고하게 자리잡은 점과 함께 더욱 현실적인 이유를 든다.

“고려 때까지만 해도 중원의 주인이 100년을 주기로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명나라는 200년이 다 되도록 안 무너지는 겁니다. 그러니 명의 헤게모니 질서가 영속할 것처럼 여겨지고, 그 질서 아래서 2인자 자리를 유지하는 게 조선의 국익이란 인식이 생겨납니다. 여기에 주자학의 배타적 화이관의 영향으로 조선과 명의 관계는 과거의 군신관계에 부자관계의 요소가 더해지는데, 이 상황에선 명을 배신하는 게 ‘천륜’을 어기는 게 돼 버립니다.”

계 교수는 광해군을 폐위시킨 반정세력의 최대 명분이 광해군의 배명(背明) 행위였던 사실이나, 조선의 지배 엘리트들이 무력으로는 청을 결코 이길 수 없음을 알면서도 청의 침공을 초래해 삼전도의 굴욕을 당한 것, 이후로도 북벌이니 대명의리니 조선중화니 하며 과거의 기억에 집착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이 때문이라고 본다. 간과해선 안 될 점은 이런 조선 지배층의 태도가 단순한 명분론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뭔가 실익이 있었다는 얘긴데, 계 교수의 설명은 이렇다.

“삼전도의 굴욕이 뭡니까. 아버지(명)가 위험에 처했는데 나 하나 살겠다며 원수(청)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부자의 연을 끊기로 약속한 사건입니다. 당시 기준으론 배반이자 패륜이지요. 만약 이것이 상황논리로 허용된다면, 피지배층에게 왕조와 양반에 대한 복종을 요구할 명분이 사라져 버립니다. 이런 절박감이 ‘소중화’를 자처하며 망해버린 명 제국에 대한 의리와 충성을 강조하는 집단적 자기최면으로 나타난 겁니다.”

하지만 조선이 대명의리적 조선중화 의식에 집착할 수 있었던 것은 역설적이게도 확고한 통치기반을 확립한 청이 내정 간섭을 중단한 덕분에 가능했다. 그런 점에서 계 교수는 조선중화론이 “청 질서의 보호막 안에서 외친 ‘수족관 안의 자부심’이었다”고 일축한다.

“명-청 교체기의 역사는 오늘날의 동아시아 현실에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습니다. 미국 헤게모니가 쇠퇴하고 중국의 부상이 가시화되는 지금 상황은, 굳이 비유하자면 누르하치가 만주를 실질적으로 장악했지만 명과의 대결에는 나서지 않은 17세기 초반의 정세와 유사하다고 할까요. 정치하는 사람이라면 정파를 떠나 어느 것이 한국을 위한 길인지 신중하게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글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lee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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