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조국’ 비판 순례기
〈빌 브라이슨 발칙한 미국 횡단기〉
<나를 부르는 숲>이라는 책으로 현대 기행문학의 대가 반열에 오른 빌 브라이슨이 1989년 쓴 미국 유람기다. 사방이 옥수수밭이라는 고향 오하이오가 재미없어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유럽으로 떠났던 그가 20년 만에 미국으로 돌아와 처음 시도한 일이 미국 횡단이란다. 공짜 좋아하는 쪼잔한 아버지 때문에 어릴 적부터 삐딱했던 그가 자동차로 미국을 횡단하면서 느낀 단상들을 특유의 독설과 재담으로 풀어놓았다. 그의 이름이 책표지에 없다면 관타나모에 갇혀 있던 탈레반이 미국을 횡단하면서 쓴 글처럼 느껴질 정도로 비판적이다. 비판이 힘을 받는 것은 그가 단지 미국인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이 책에서 여행지에 대한 단상과 함께 코흘리개 시절인 1950년대에 아버지와 떠났던 여행과 히피였던 60년대 대학시절 여행의 추억을 버무린다. 그리고 과거보다 나아진 것이 별로 없는 미국의 살벌한 현실을 보여주는 통계 자료가 겹쳐진다. 이 대목은 빌 브라이슨이 기자 출신이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초등학교 시절 처음으로 흑인이 총을 맞아 죽는 걸 봤던 워싱턴에서 그는 흑인들의 삶이 지금도 큰 변화가 없다고 생각한다. 16살 때 성냥갑 아파트에서 쌍안경으로 옷을 벗는 여자를 훔쳐보던 뉴욕을 20년 만에 다시 찾은 그는 인도 뉴델리에서보다 더 많은 거지를 만났다고 적었다. 하지만 여행중에 그의 비판정신이 작동을 멈춘 곳도 있었다. 남부의 사바나, 서부의 산타페, 동부의 케이프코드다. 얼마나 근사했으면 그의 독한 혀가 멈췄을까? 권상미 옮김/ 21세기북스·1만3000원 권은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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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서진 동심’ 어루만지기
〈슬픈 아이들의 심리학〉
엄마 없는 하늘 아래. 아이들의 삶은 어떻게 변해 갈까. 학교심리학자인 재니스 디 치아코의 <슬픈 아이들의 심리학>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아이들을 위한 책이다. 지은이는 사고, 이혼, 전쟁 등 여러가지 사정으로 가족이나 친구를 잃는 아이들이 입는 마음의 상처와 그 치유법에 대해 이야기한다. 어른들은 종종 아이가 겪는 ‘상실’을 가볍게 여기고 만다. 나이가 어려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은이는 아이들은 어리기 때문에 그 슬픔이 훨씬 깊고 어두울 수 있다고 지적한다. 아이들은 모든 면에서 성장중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상실에 대처할 만큼의 경험이 부족하고 뇌도 충분히 발달하지 않았다. 그 결과 마음속에 불안정, 불신, 고립의 감정이 더 커질 수 있다.
지은이는 치료를 위해서는 아이의 성장 단계를 숙지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조언한다. 사랑하는 이의 부재를 경험한 시기의 발달 과제를 제대로 파악해야 아이의 발달이 단계를 밟아 진행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부서진 시간 퍼즐을 맞추기 위해서는 무한한 인내심이 필요하다. 충분한 시간을 두고 이야기를 들어주며 끊임없는 격려와 사랑으로 작은 영혼들의 상처를 어루만져야 한다. 그제서야 아이들은 어둠을 벗어나 한걸음씩 앞으로 나갈 수 있다. 책은 슬픔을 경험하는 아이들의 심리를 설명하는 1부와 실제 사례를 소개하는 2부로 구성되어 있다. 스토리텔링, 아로마 테라피, 캐치볼 등 구체적이고 물리적인 치료법도 함께 소개되어 있다. 정연희 옮김/휴먼앤북스·1만2000원. 윤은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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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해가 저문 이유는?
〈영국 제국의 초상〉
빅토리아 시대 후기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최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영국은 당시 세계의 5분의 1을 지배했던 대제국이었다. 동시에 쇠락의 기미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수도 런던에는 식민지에서 들어온 값싼 재화의 혜택을 누리는 엘리트 계층과 도시 빈민층으로 전락한 몰락 농민들이 같이 살고 있었다. <영국 제국의 초상>은 빅토리아 시대 후기 영광과 쇠락이 뒤범벅된 영국의 풍경을 평론지들의 논설들을 통해 들여다본다.
시험 제도는 대표적 토론 거리였다. 대학교수들은 고시 열풍에 휩싸인 대학가, 요점정리식 암기의 부작용, 학원강의의 폐단을 걱정하는 글들을 쏟아냈다. 시험 제도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이들은 이전까지 관료 충원 방식인 추천제도가 부패의 뿌리라며, 경쟁 시험이 연줄 대신 능력에 따른 인재 발탁에 이바지했다고 맞섰다. 양쪽 모두 본질을 건드리진 못했다. 관료 인력 구성의 본질은 바뀌지 않았던 것이다. 관료를 주로 배출하는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같은 명문대에 진학하는 학생들은 이튼과 해로 등의 명문 중등학교 출신이 대부분이라는 사실에는 눈을 감았다. 지식인들은 당시 런던의 대표적 빈민가 이스트엔드에도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 이스트엔드의 실태를 집중조명해 주택개량 같은 개선책도 끌어냈다. 빈곤과 타락을 세밀하게 묘사한 논설들이 이스트엔드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같이 키우는 부작용도 동시에 드러냈다. 100여년 전 영국의 풍경을 읽고 있노라면 때때로 지금 한국의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이영석 지음/푸른 역사·2만원 조기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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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손에 ‘쏙’ 나비·새 생태도감
〈필드가이드 나비, 필드 가이드 새〉
말 그대로 손바닥만한 생태도감 시리즈가 나왔다. 국내 처음이다. 크기가 82㎜×117㎜, 깜직하고 가볍다. 현장 학습이나 자연 탐사 때마다 도시락보다 더 무거운 도감 때문에 골치가 아파 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에게 반가운 소식이다. 더 반가운 건 내용도 알차다는 점이다. 지금 현장에서 가장 부지런히 활동하는 40~50대 중견 연구가와 생태 전문 사진가들이 짝을 지어 만들었다. 초·중·고교 교과서에 나오는 생물들은 물론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자연의 친구들을 생생한 실사 사진과 함께 소개해놓아 초보자들도 쉽게 이름이나 종을 구별할 수 있겠다.
우선 ‘현장체험학습-자연탐사의 안내자’란 부제를 달고 <나비>와 <새> 도감이 나란히 나왔다. ‘나비’ 편에는 우리나라에서 채집된 나비 260여종 가운데 224종을 548장의 사진과 함께 설명해놓았다. 지은이 김성수 박사가 처음 발견해 학계에 보고한 신종 ‘우리녹색부전나비’를 비롯한 모든 토착종과 미접(길 잃은 나비)까지 등장해 국내 최고의 종수를 담았다. 사진은 20년 넘게 곤충 사진만 찍어온 허필욱씨 작품이다. ‘새’ 편 역시 320종 630장의 사진이 실려, 한 권에 가장 종수를 많이 수록한 도감으로 기록됐다. 느시, 넓적부리도요, 검은머리딱새와 같은 희귀새들의 생태 정보도 들어 있다. 원병오·윤무부 교수를 잇는 경희대 출신 ‘새 박사’인 이기섭씨와 사진기자 출신인 이종렬씨가 함께 작업했다. 올해 안에 ‘봄꽃’ 편이 더 나오고, ‘곤충’ ‘여름·가을꽃’ ‘잠자리’ ‘갯벌’ ‘양서파충류’ ‘거리’ ‘숲’ 등으로 이어질 예정이다. /필드가이드·각 권 1만2500원. 김경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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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라 부르니가 ‘터미네이터’라고?
〈심각하지 않아〉
낙태, 약물중독, 한때 ‘새엄마’였던 여자와 결혼한다며 떠난 남편, 암에 걸린 엄마…. 꼬리에 꼬리를 무는 불행이 루이즈의 20대를 덮쳤다. 루이즈는 각별한 사이였던 할머니의 장례식을 계기로 불행의 근원을 찾아 과거를 복기해나간다. 가장 먼저 샴쌍둥이처럼 뇌와 심장을 공유하며 사랑했던 남편을 빼앗아간 여자를 떠올린다. “포르말린에 담근 듯한 얼굴로 터미네이터처럼 웃는” 그 여자는 슈퍼모델 출신이었고, 시아버지의 애인이었다. “나는 밀랍에 새긴 조각처럼 미동도 없는 그녀가 아름답지만 위험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마치 얼굴뼈 몇 개가 움직이는 것처럼 부자연스럽게 이를 활짝 드러내며 웃었고, 그 이들은 모두 똑같은 모양으로 깎여 있었다.”
<심각하지 않아>는 프랑스의 저명한 지식인 베르나르앙리 레비의 딸이자 스물한 살 때 데뷔 소설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주스틴 레비가 쓴 자전적 소설이다. 출간 직후 화제를 모으며 전 유럽 베스트셀러가 된 까닭은 소설 속 ‘그 여자’ 때문이다. 바로 프랑스 대통령 부인인 카를라 부르니다. 하지만 작가는 그녀를 저주하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고백처럼 그간의 일을 쏟아내는 과정에서 상처를 더 깊이 파고든다. 그 바닥에는 ‘부재 중’ 부모, 형편없이 낮은 자존감, 의존적 자아, 전남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있었다. 그리하여 내린 결론. “사람들은 삶을 치열하게 껴안고 만끽하는 이들과, 영혼의 조그만 상처를 치료하는 데 시간을 다 보내는 불구자들, 이 둘로 나뉜다.” 이희정 옮김/꾸리에·1만1000원. 김일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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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는 과학’ 체계적 배우 지침서
〈배우수련〉
“이 세상에서 사람이 해볼 만한 직업으로 배우 이상이 없다. 정말 잘할 수만 있다면 말이다.” 극작가 동랑 유치진은 이렇게 말했다. 배우에게 연기력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배우를 ‘꽃’이라 칭하는 이유 역시 그 화려함 때문이 아니라 연기력이 바탕이 되어 관객과 소통하기 때문이다. 누구나 한 번쯤 배우를 꿈꾼다. 하지만 ‘하겠다’고 마음먹고도, 지레 겁먹고 포기하는 이유는 ‘잘할 자신’이 없어서다. 다시 말해, 진정한 배우가 되려면? 실력을 갈고닦아야 한다. 20세기 최고의 배우로 꼽히는 로런스 올리비에는 훈련을 통해 무대공포증을 극복했다.
<배우수련>은 배우를 꿈꾸는, 혹은 연기의 폭을 넓히고 싶은 이들을 위한 책이다. 최민식, 박신양, 채시라, 김혜수 등의 연기 스승이이자, “연기는 곧 과학”이라는 철학으로 우리나라 배우훈련 방법론을 체계화한 안민수씨가 오랜 연출 경험을 정리했다. 지금껏 배우 지망생과 전문 배우들이 체계적인 국내 연기훈련서가 없어 번역서에 의존했다면, 이 책은 우리 형식에 맞춘 최초의 배우 훈련서인 셈이다. 모두 8강의 강의 형식으로 구성했다. 1강과 2강은 배우의 의미와 자세를, 3강부터 5강은 호흡법, 몸풀기와 소리내기 등 배우의 심신 훈련 방법을, 6강부터 8강은 대사 낭송, 역할 창조, 대본 분석 등 연기를 잘하기 위한 실질적인 방법을 수록했다. 지은이는 “배우는 70살이 되어도 필요할 때 스승을 찾아다니며 레슨을 받으면서 교정을 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진정한 배우를 꿈꾸는가. 그럼 이 책을 읽어보시길. 안민수 지음/헤르메스미디어·1만7000원. 김미영 기자
kimmy@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