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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남·북·중 함께 ‘평화주의자 안중근’ 불러낸다

등록 2009-10-22 18:10수정 2009-10-22 21:10

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오른쪽). 100년 전 두 사람의 비극적 만남을 한·일 두 나라는 ‘의거’와 ‘테러’라는 상극의 언어로 기억한다.
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오른쪽). 100년 전 두 사람의 비극적 만남을 한·일 두 나라는 ‘의거’와 ‘테러’라는 상극의 언어로 기억한다.
‘안중근과 동북아 평화’ 학술대회




‘평화주의자 안중근’은 낯설다. 한국인의 의식 속에 안중근이란 존재는, 조련도 안 된 경무장 의병부대로 최강의 일본 군대와 사투를 벌이고, 첩첩의 경계망을 뚫고 들어가 제국의 거물 정객을 향해 총탄을 날린, 타고난 무골(武骨)의 장부 이미지로 부호화돼 있기 때문이다. 그에 대한 평가는 국경을 사이에 두고도 극단적으로 엇갈렸다. 한국에선 국권 침탈의 원흉을 척살한 민족의 영웅이었지만, 일본에서 그는 ‘현대 정치의 아버지’를 살해한 조선의 편협한 정치 자객일 뿐이었다. 일국적 관점에 포획된 민족주의 역사인식의 당연한 귀결이었다. 이런 점에서 ‘평화주의자 안중근’에 주목한 남·북·중 3개국의 공동학술대회는 그 의미가 남다르다.

옥중집필 유고 통해 ‘동아시아 공동체’ 인식 재조명
‘원초적 민족주의’ 후광 걷고 세계주의자 면모 주목

한국학중앙연구원 현대한국연구소와 북한의 조선사회과학자협회, 중국 다롄(대련)대 한국학연구원 등이 ‘안중근 의거 100주년’을 맞아 25~26일 중국 다롄에서 함께 여는 이번 학술대회의 주제는 ‘안중근과 동북아 평화’. 한국에서는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박명규 서울대 교수, 최원식 인하대 교수, 김경일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가 참석해 ‘동아시아의 맥락에서 본 안중근과 동양평화론’ ‘동양평화론의 현재적 가치와 미래상’ 등의 논문을 발표한다.

북한과 중국 쪽 참가자들이 안중근과 ‘하얼빈 의거’에 대한 자국내 평가를 주로 다루는 데 반해, 한국 참가자들은 안중근이 옥중 집필한 미완성 유고 <동양평화론>에 나타난 평화주의적 신념과 ‘동아시아 공동체’에 대한 맹아적 인식에 초점을 맞춘다. <동양평화론>은 사형선고를 받은 안중근이 항소권을 포기하는 대신 재판부로부터 집필 허락을 받아 옥중에서 쓴 미완성 논설로 서양세력의 침략을 막기 위해 동양삼국의 단합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선 한국의 독립이 필수적이란 주장을 담고 있다. 특히 동양평화의 구체적 실현 방법으로 한·중·일 3국 평화회의 개설과 은행 설립을 통한 공통화폐 발행, 공동의 군대 창설 등을 제안한 부분에 대해선 ‘100년의 시공을 뛰어넘는 선구적 통찰’이란 평가도 나온다.

김삼웅 전 관장은 ‘자유케 하는 폭력’이란 관점에서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안중근의 ‘거사’는 “동양평화를 유린한, 제국주의 침략자를 처단함으로써 국제평화를 유지하려는 평화운동의 일환이었다”는 것이다. “일본 일각에서 (안중근을 두고) 암살자·테러리스트 운운하는 것은 폭력에 대한 인식 부족에서 기인한다. 이토가 한국과 대륙을 침략하면서 ‘동양평화를 위해서’라는 명분을 들었는데, 이는 ‘속박하는 폭력’이요, 안중근이 이토를 처단한 것은 ‘자유케 하는 폭력’이었다.”


왼쪽부터 김삼웅, 박명규, 김경일
왼쪽부터 김삼웅, 박명규, 김경일
박명규 교수는 안중근이 보여준 ‘국제평화주의자’의 식견을 남북한과 동북아시아의 공유 자산으로 삼을 것을 제안한다. 박 교수가 볼 때 안중근이 옥중에서 남긴 <동양평화론>의 요체는 ‘동양의 모든 국가들이 자주독립 상태에서 평화와 협력을 추구해 나가야 한다’는 데 있다. 박 교수는 이런 안중근의 원칙이 한반도 통일과 관련해 중요한 지침을 제공한다고 보는데, 통일국가 건설이 여전히 중요한 시대적 과제라는 점뿐 아니라, 통일은 배타적·자폐적인 방식이 아닌 주변국과의 연대와 상호작용을 통해 이뤄져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는 것이다.

김경일 교수는 안중근의 사상에서 엿보이는 개방적 민족주의와 세계주의적 지향에 주목한다. 안중근으로부터 ‘민족 제1의 공적을 처단한 영웅’이라는 원초적 민족주의의 후광을 걷어낼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김 교수는 안중근 역시 “민족주의적 동원이라는 전후 남한 사회의 필요에서 일면화되고 경직돼 가는 과정을 밟았다”고 본다. 따라서 그에게 부착된 역사의 흔적들을 제거한다면, 그의 민족주의가 “한국을 위해, 나아가선 세계를 위해 열림을 지향하는” 개방된 민족주의라는 사실이 드러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가 특히 주목하는 것은 안중근이 자신의 재판을 조선법도, 일본법도, 러시아법도 아닌 만국공법(국제법)의 절차에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던 점이다. 이를 두고 김 교수는 “보편주의적 세계주의에 대한 그의 믿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그의 동양평화론이 편협한 민족주의나 지역주의가 아닌, 보편적 가치에 대한 헌신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평가한다.

그러나 발표자들은 안중근의 탁월함만을 강조하는 일부의 시각엔 경계심을 드러냈다. 동양평화론이 안중근만의 독창적 사상도 아닐뿐더러, 당시 일본의 아시아주의로부터 영향을 받은 다수의 동양평화론이 그렇듯, 인종주의와 일본맹주론에서 자유롭지 않은 것도 사실이라는 것이다.

“안중근은 완전한 인물이 아니다. 그를 무조건 영웅시하기보다 삶과 죽음, 사상과 행적을 함께 해석하고 그 의미를 공유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100년 전 이토 히로부미와 안중근의 비극적 만남에 대하여 21세기 한국과 일본, 중국이 같은 의미부여를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그가 꿈꾸던 동양평화의 본격적 장이 열릴 것이다.”(박명규 교수)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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