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전 대통령을 두고 극단적으로 엇갈린 평가를 내려온 진보·보수 학계가 다시 한 번 격돌한다. 그의 서거 30주기를 앞두고 연세대 동서문제연구원이 19일 ‘박정희와 그의 유산’이란 주제로 여는 국제학술회의에서다.
함재봉·박명림 등 학자들
정치·경제적 유산 등 논의
보수 학자로는 함재봉 미국 랜드연구소 수석정치학자와 류석춘(연세대)·김형아(오스트레일리아국립대) 교수가, 진보 쪽에서는 박명림(연세대)·임혁백(고려대)·김동노(연세대) 교수가 나서 박 전 대통령이 남긴 정치·경제·사회문화적 유산 등에 대해 발표한다. 보수 학자들이 대체로 그의 통치 18년에 드리운 독재의 그림자를 걷어내는 데 주력한다면, 진보 학자들은 박정희 숭배의 중핵을 구성하는 발전 신화의 허구성을 폭로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함재봉 박사는 박정희 정권의 권위주의 독재를 ‘역사적 보편’이란 차원에서 정당화하고자 한다. 통치방식이 정치적으로 바르지 못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 말고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는 논리다. 그는 박 정권의 성취로 효과적인 ‘국민(국가) 형성’을 꼽는데, 이런 정치질서를 만들어내는 데 있어 ‘정치적으로 올바른’ 방법 같은 건 애초부터 없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그 근거로 함 박사는 마키아벨리나 홉스, 푸코 모두 근대 권력의 억압성을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것으로 간주했다는 점을 든다.
한마디로 박정희의 독재는 “개인적인 도덕적 실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국민 형성의 근본적인 역설과 아이러니의 반영”일 뿐이라는 얘기다. 억압통치의 불가피성을 후발국가의 한계로 특수화하기보다, ‘근대 권력의 근본적 억압성’이라는 보편성의 차원으로 끌어올린 셈이다.
왼쪽부터 함재봉 미국 랜드연구소 수석정치학자, 박명림 연세대 교수
류석춘·왕혜숙 교수는 박정희 정부의 유산을 옹호하는 데서 한걸음 나아가 박정희식 ‘강한 국가’의 복원을 촉구한다. 이들이 볼 때 박정희 시대는 ‘강한 국가’와 ‘강한 사회’가 짝을 이루면서 전략과 실행의 통일성을 확보하고, 그에 따른 시너지를 극대화한 경우였다. 박정희 시대의 성취에는 국가의 능력뿐 아니라 국가의 전략을 수용하고 실행하면서도 일방적 독주는 견제했던 강한 사회의 역할이 중요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국가는 약해진 반면 사회는 여전히 강한 상태가 유지돼 문제가 생기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강한 사회를 뒷받침할 강한 국가”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이에 맞서는 진보 쪽의 박명림 교수는 박정희 옹호론의 핵심 근거인 경제적 성취 문제를 집중적으로 파고든다. 박 교수의 전략은 박정희 정부 시기의 경제적 성취를 비슷한 발전단계의 국가들, 그리고 한국의 다른 정부들, 나아가 서로 경쟁했던 북한과 비교하는 것이다. 그는 집권 기간의 경제성장률, 정권이양 시점의 외환보유고, 수출 증가율, 물가 상승률 등을 비교한 뒤 박정희 정부의 성취가 동시대 대만·중국·싱가포르·말레이시아는 물론이고 한국의 김대중·노무현 정부와 비교해도 결코 두드러진 것이 아니었다고 결론짓는다.
박 교수는 다만 박정희가 김일성과의 대결에서 이긴 것은 사실이지만, 그 승리에는 김일성이 일으킨 전쟁과 이후 체제 경쟁의 의도하지 않은 효과, 남한 내 민주세력의 도전이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된다고 강조한다.
김동노 교수는 박정희 장기집권의 사회적 동력을 비판적 시각에서 규명한다. 불법 쿠데타를 통해 집권했는데도 장기간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강한 억압이나 경제적 성취 때문이 아니라, 독특한 통제전략 덕분이란 것이다. 김 교수가 주목하는 것은 민족주의적 이념 조작과 새마을 운동을 통한 전통적 통제질서의 복원이다. 이념으로는 민족을, 일상적 통치기구로는 마을 공동체를 앞세워 개인이 국가의 억압성을 직접 체험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정권에 대한 불만과 저항을 봉쇄할 수 있었다는 분석이다.
20일까지 연세대에서 계속되는 이번 행사에는 미국과 영국, 오스트레일리아의 한국학 연구자들도 참가해 ‘박정희 노선’과 한국식 발전국가 모델에 대한 외국 학계의 평가와 시각을 소개할 예정이다. 박정희 시대를 조명하는 학술행사는 다음달에도 이어져 11월9일에는 진보·개혁 성향 학술단체와 싱크탱크가 주최하는 박정희 토론회가 서울에서 열린다.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한겨레> 자료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