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산에 대한 처분권이 인간다운 삶의 권리에 우선한다는 그 비정한 상식은 대체 어디에 근거하는가. 용산참사는 자유권·사회권의 위계적 이분법에 포획된 전통 인권 담론에 윤리적 파산을 선고한 사건이었다. <한겨레> 자료사진
새 패러다임 제시한 ‘인권의 대전환’
권리와 권리가 충돌할 때 다툼이 생긴다. 재개발 분쟁도 그런 경우다. 대체로 “내 뜻대로 처분하겠다”는 집주인의 재산권과 “인간답게 살아보자”는 세입자의 주거권이 부딪쳐 사달이 난다. 공권력이 투입되는 최악의 상황으로 번지기도 한다. 이 경우 공권력은 백이면 백, 집주인 편이다. 시민들은 방관한다. 재산권이야말로 시장경제를 지탱하는 지고의 권리라는 게 그들이 학습해온 상식인 까닭이다. ‘용산’에 대한 집단 침묵의 배후에서 작동하는 것도 바로 이 상식이었다. 소유물에 대한 처분권이 인간다운 삶의 권리에 우선한다는 이 비정한 상식은 대체 어디에 근거하는가.
출간 시기가 더없이 적절하다. 샌드라 프레드먼 옥스퍼드대 교수가 쓴 <인권의 대전환>(교양인)이다. 2008년 영국에서 출간된 직후 “인권이론의 패러다임을 바꿀 만한 책”이라 평가받았다. 책을 옮긴 조효제(사진) 성공회대 교수는 “인권 개념을 재구성해 그동안 부차적·파생적 권리로 간주돼 온 사회·경제적 권리의 중요성을 효과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다”고 소개한다. 인권을 자유권(시민적·정치적 권리)과 사회권(사회적·경제적 권리)로 구분하면서 앞의 권리에 역사적·논리적 우선권을 둬온 기존의 인권 담론을 해체함으로써 최근 쟁점이 되고 있는 사회적 권리에 관한 논의에 새 지평을 열어준다는 얘기다.
자유권 침범 않는 소극적 국가 넘어
사회·경제 권리 위해 ‘적극 개입’ 주장 프레드먼 명저…조효제 교수 번역
“용산사건 재판부가 이 책 읽었으면”
글쓴이가 볼 때 인권은 권리 주체인 개인 뿐 아니라, 의무의 주체로서 국가의 역할을 동시에 요청한다. 모든 ‘권리’ 개념은 권리의 주체가 의무의 주체에게 어떤 근거에서 어떤 권리를 요구하는 논리 구조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통적 인권담론에선 권리 주체인 개인만 강조되고 개인의 권리를 충족시켜야 할 국가의 의무는 제대로 부각되지 않다보니 국가가 말로는 인권을 인정하면서도 실천에는 소극적인 경우가 잦았다고 글쓴이는 지적한다.
책은 권리 개념에 동반되는 국가의 의무 개념을 도출한 뒤, 이를 다시 소극적 의무와 적극적 의무로 구분한다. 소극적 의무가 개인 권리를 침해하지 않기 위해 국가가 개입하지 않는 것(자기 억제)이라면, 적극적 의무는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국가가 개입하는 것이다. 따라서 소극적 의무가 전통적인 자유권과 짝을 이룬 것이라면, 적극적 의무는 사회권에 대응하는데, 핵심은 이 두 가지 의무가 현실에서 결코 따로 존재할 수 없다는 점이다. 촛불집회를 예로 들어보자. 시민들이 경찰을 향해 광장을 열라, 때리지 말라 요구하는 건 자유권의 영역에 속한다. 하지만 그 자리에 나오고 싶어도 배가 고파서 또는 신체의 장애 때문에 못 나오는 시민들이 있을 수 있다. 시민적 권리를 주장하려면 적어도 소리칠 기력과 능력은 있어야 한다는 얘긴데, 이것을 보장하는 게 사회권이다. 옮긴이 조효제 교수의 설명이다.
“모든 인권 현안에는 자유권적 속성과 사회권적 속성이 동시에 존재합니다. 이걸 국가의 의무 차원으로 전환해 말하면 이렇습니다. 광장을 열어주고 물리적 탄압을 않는 것만으로 국가는 인권 준수의 의무를 다하는 게 아닙니다. 시민들이 최대한 자유롭고 평화로운 방식으로 권리 주장을 펼칠 수 있게 교통을 통제하고, 화장실과 식수 등 편의를 제공하는 것도 국가의 의무에 포함된다는 얘깁니다.”
또 책은 민주주의 국가에서 법원이 담당해야 할 능동적 역할을 강조한다. 국가가 인권을 보장하도록 촉구하고 감시함으로써 민주주의 체제를 보존·지원하는 것이 사법부의 궁극적 역할이어야 한다는 얘기다. 일종의 ‘민주적 사법 적극주의’다. 물론 이것은 법원의 판결로 정치를 대체하자는 게 아니다. 사법적 절차를 통해 대의제의 단점을 보완하자는 것, 예컨대 법원은 정부가 국민을 위해 지키겠다고 약속한 것을 위반할 경우 재판을 통해 그에 대한 설명과 시정을 요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조효제 교수는 “이 책은 민주주의와 사법부의 역할에 대한 숙고의 계기를 제공하고 있다”며 “양심과 법에 의거해 초연하게 판결하는 것이 주어진 책무라고 생각하는 양심적 판사들, 특히 방송법 권한쟁의 소송을 다룰 헌법재판소와 용산사건의 재판부가 이 책을 읽어준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사회·경제 권리 위해 ‘적극 개입’ 주장 프레드먼 명저…조효제 교수 번역
“용산사건 재판부가 이 책 읽었으면”
조효제 성공회대 교수
“모든 인권 현안에는 자유권적 속성과 사회권적 속성이 동시에 존재합니다. 이걸 국가의 의무 차원으로 전환해 말하면 이렇습니다. 광장을 열어주고 물리적 탄압을 않는 것만으로 국가는 인권 준수의 의무를 다하는 게 아닙니다. 시민들이 최대한 자유롭고 평화로운 방식으로 권리 주장을 펼칠 수 있게 교통을 통제하고, 화장실과 식수 등 편의를 제공하는 것도 국가의 의무에 포함된다는 얘깁니다.”
〈인권의 대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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