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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진중권식 그림읽기’ 정답은 없다

등록 2009-10-09 19:31

네덜란드 농민 화가 피터르 브뤼헐(1525~1569)이 그린 풍속화〈교수대 위의 까치〉.
네덜란드 농민 화가 피터르 브뤼헐(1525~1569)이 그린 풍속화〈교수대 위의 까치〉.
‘교수대…’ 등 글쓴이 관심작품 12점
미학·예술사 관통하는 독창적 해석
최근의 ‘일상적 부조리 체험’도 반영
〈교수대 위의 까치〉
진중권 지음/휴머니스트·1만5000원

<교수대 위의 까치>(그림)는 네덜란드 농민 화가 피터르 브뤼헐(1525~1569)이 그린 풍속화다. 누런 잿빛이 압도하는 화폭의 분위기부터 음울하고 스산하기 짝이 없다. 까치가 내려앉은 교수대 주변에 띄엄띄엄 모여 있는 사람들. 형장을 둘러싼 수목들 너머엔 박무가 깔린 촌락과 벌판이 펼쳐진다. 묘사된 인물들의 행동 역시 기괴하기만 한데, 교수대 아래서 남녀가 손을 맞잡고 흥겹게 춤을 추는가 하면, 아스라한 풍경을 가리키며 손을 뻗거나, 관목 수풀에 몸을 숨긴 채 알궁둥이로 똥 누는 남자도 있다. 대체 화가는 무엇을 그리고자 했을까. 그림 전체가 해독을 기다리는 암호문 같다.

〈교수대 위의 까치〉
〈교수대 위의 까치〉
책을 쓴 진중권씨는 이 그림을 “상식이 통하지 않는 뒤집힌 세상, 그것의 부조리와 불합리의 무시무시한 상징”으로 읽는다. 이 해석에 공감하려면 작품이 제작되던 당시의 정치상황에 대해 얼마간의 지식이 필요한데, 글쓴이의 설명은 이렇다. 브뤼헐이 그림을 그리기 두 해 전인 1566년 네덜란드에선 가톨릭의 전횡에 맞서 신교도들이 봉기를 일으킨다. 당시 네덜란드를 통치하던 스페인은 즉시 군대를 보내 봉기군을 진압한 뒤 ‘공안 평의회’라는 기구를 만들어 정치적 반대자들을 투옥하고 고문하고 처형한다.

이런 배경지식을 깔고 보면, 교수대 위에 앉은 까치는 가벼운 입으로 동포들을 형장으로 보낸 밀고자나, 입 한번 잘못 놀려 교수대에 목이 걸린 네덜란드 민중, 그리고 이 폭압적 상황의 부조리함에 대한 정치적 상징이 된다. 공포스런 교수대 아래서 즐겁게 춤을 추거나 그 주변에 감히 똥을 갈기는 농민들 역시 부조리의 일부이긴 마찬가지다.

흥미로운 것은 기묘하게 뒤틀어진 교수대의 모습인데, 투시법을 교묘하게 이용해 3차원 공간에선 불가능한 형태를 2차원의 도상 위에 그려넣은 것이다. 글쓴이는 이를 두고 “이른바 ‘불가능한 형태’가 미술사에 등장한 최초의 사례”라고 단언한다. 같은 교수대가 브뤼헐의 다른 작품에도 등장하는 점으로 미뤄 의도된 묘사가 분명하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그 자체가 부조리한 형상인 셈이다. 하지만 이 세상 역시 온갖 부조리와 불합리로 가득 차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저 부조리한 교수대야말로 브뤼헐이 바라본 세계 자체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해석은 독창적인 것이다. 글쓴이에 따르면 이 작품에 대해선 이미 여러 갈래의 풀이가 나와 있다. 가장 영향력 있는 것이 네덜란드 속담을 형상화해 보는 이에게 도덕적 메시지를 던진다는 해석이다. 교수대 아래에 묘사된 사람들의 행동은 ‘교수대 아래서 춤춘다’ ‘교수대에 똥 눈다’는 동시대의 속담, 우리로 치면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경구를 표현한다는 것이다. 이 경우 교수대에 앉은 까치는 ‘권력의 무서움을 모르고 경솔한 언행을 하지 말라’는 도덕적 권고의 알레고리가 된다. 정반대의 풀이도 있다. 등장인물들의 행동은 탄압을 두려워하기는커녕 권력에 저항하고 조롱하는 민중의 용기를 상징한다는 해석이다.

대체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까. 정답은 없다. 글쓴이도 책의 성격을 “범례적인 것”이라 못박는다. 그것은 미술 작품이 “제작된 순간 완성되는 죽은 ‘물건’이 아니라 끝없는 물음과 답변의 놀이를 통해 영원히 자신을 형성해가는 ‘생물’이기 때문”이다. 결국 감상자에게 요구되는 덕목은 “작품을 보며 스스로 물음을 제기하고 스스로 대답하는 것”이다.


책에는 브뤼헐의 작품 외에도 프라 안젤리코의 <조롱당하는 그리스도>(1440~1441), 요하네스 굼프의 <자화상>(1646), 기스브레히츠의 <뒤집어진 캔버스>(1670) 등 12점의 그림에 대한 ‘진중권식 암호 풀이’가 담겨 있다. 이 작품들을 가리켜 글쓴이는 “나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했던 “내가 소장하고 싶은 가상 컬렉션”의 일부라 했다. 독립된 장들 하나하나마다 미학과 예술사를 관통해온 핵심적인 논제들이 구체적인 작품들을 매개로 정교하고 생생하게 해부된다. 여러 작품 중에서 특별히 브뤼헐의 <교수대…>를 표제로 뽑은 것에 대해 글쓴이는 “영적 울림에 가까운 푼크툼(내밀한 체험)의 효과를 주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가 이 작품에서 감지하는 ‘부조리의 일상성’과 ‘비정상의 정상성’이 동시대 현실에서 어떤 형태로 변주되고 있는지를, 우리는 글쓴이를 둘러싸고 벌어진 일련의 사태 속에서 생생히 목격했다.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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