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남북한의 경제통합이 우리의 지상과제일 순 없습니다. 세계화와 블록화가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 됐는데, 언제까지 ‘민족경제 건설’이라는 낡은 화두만 붙들고 있을 겁니까.”
일국 경제의 테두리를 넘어서는 진보적 경제 패러다임을 모색해온 이일영(사진) 한신대 교수가 최근의 문제의식과 경제구상을 체계화한 <새로운 진보의 대안, 한반도경제>(창비)를 출간했다. 계간 <동향과 전망>과 <창작과 비평> 등에 기고해 온 남북한과 동아시아 경제, 대안적 경제모델에 관한 논문들을 모아 손질한 책이다.
‘남북 제도 개혁→경제통합→세계공존’ 기획
“동아시아 모델 개선하고 연대 환경 구축을”
책의 제목이기도 한 ‘한반도경제’에 대해 이 교수는 “글자 그대로 지리적 경제단위로만 이해해선 곤란하다”고 말한다. 한반도경제는 경제현상의 분석을 위한 개념적 도구일 뿐 아니라, 현실의 제약과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실천적 프로젝트의 성격도 함께 갖는다는 얘기다.
“한반도경제는 남북한을 아우르는 포괄적 경제단위이면서, 남북한의 시스템을 개혁하고 통합하면서 세계와 공존하게 만들려는 정치경제적 기획입니다. 이 점에서 남북간 협력과 분업을 통해 발전과 안정성을 확보하려는 ‘민족경제’ 구상과도 유사합니다.”
하지만 이 교수는 민족경제보다 한반도경제라는 용어를 선호하는데, 민족경제라는 개념에 내장된 폐쇄성과 배타성을 경계해서다.
“분단경제의 기형적 성격과 그것이 강요하는 억압과 모순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민족경제 개념의 공로는 지대합니다. 하지만 민족이란 단위에만 집착하다 보니 내부의 지역사회나, 민족국가를 넘어서는 동아시아의 단위에서 사고하고 행동할 여지를 봉쇄해버릴 위험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민족경제 대신 남북한과 내부의 지역사회, 동아시아까지 포괄하는 중층적 개념으로 한반도경제란 개념을 사용합니다.”
이 교수에 따르면 한반도경제는 세 개의 축에 의해 지탱된다. 민주적이고 공공적인 국가, 활성화된 지역, 시장과 위계조직의 중간형태로 존재하는 다양한 혼합경제조직(협동조합·사회적기업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런 경제시스템이 만들어지려면 남북한 내부의 제도 개혁과 남북간 경제통합이 동시에 진행되어야 한다. 이 대목에서 이 교수는 한국 지식인들 사이에서 대안적 경제모델로 각광받고 있는 유럽식 사회민주주의 모델의 문제점을 꼬집는다.
“무엇보다 한국에는 유럽의 사회민주주의적 타협을 가능케 했던 제도와 규율, 계급간 세력균형이 확보되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남북간 통합을 고려해야 하는 한반도 상황에서 사회민주주의 모델은 융통성 있는 재정운용이 어렵다는 치명적 약점까지 안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한반도경제가 채택해야 할 현실적인 대안 모델은 무엇일까. 이 교수는 동아시아 모델의 개선에 기대를 건다. 개방과 세계화가 진전된 지금 과거 한국경제의 고도성장을 가능케 했던 동아시아 모델의 성공을 재연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지만, 경제시스템의 제도적 관성을 고려한다면, 동아시아 모델에서 급격하게 이탈하는 것도 많은 비용과 고통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유일한 방책은 동아시아 모델을 개선해 개방적 국제환경에 적응하면서 사회적 연대를 실현할 수 있도록 제도환경을 구축하는 것입니다. 다행히 동아시아에는 기존의 일본형 모델과 최근 유력한 모델로 등장한 중국형 모델이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 가운데 ‘더 좋아진 동아시아 모델’이 형성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이 교수는 한반도경제론을 완결된 이론이 아닌, 형성중인 담론으로 봐줄 것을 당부했다. 한반도경제론이란 브랜드를 전면에 내세울 만큼 이론적 체계나 인식적 전제를 갖춘 상태는 아니란 것이다.
“설명력과 예측력이 부족해 중도 탈락하는 비공식 이론이 부지기수예요. 한반도경제가 단순한 문제의식 수준에 머무르지 않으려면 미시적 차원의 정교한 분석과 이론구성 작업이 필수적입니다. 한반도경제론은 이제 막 출발선에 서 있는 셈입니다.”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