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수 김대중 ‘이승에 남긴 편지’
〈옥중서신-김대중이 이희호에게〉
“빤스에 허리를 넓은 고무천으로 댄 것은 넣지 말고 천을 겹쳐서 그 사이에 고무줄 넣은 것으로 바꿔주시오. 그래야 그 사이에 펜을 찔러 넣을 수 있어요.”(1978년 9월18일) 김대중 전 대통령이 ‘3·1 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1977년 진주교도소에 수감돼 있다가 건강상태가 나빠져 서울대병원으로 옮겨, ‘병실 감옥’에서 감시원의 감시를 피해 부인 이희호씨에게 몰래 보낸 메모의 일부다.
“연락편지만 엷은 종이에 적어서 변기물통 위에 있는 조화의 플라스틱 화분 열면(이중임) 밑에 넣고 다시 닫을 수 있소.”(1978년 8월29일) 병실은 감시원이 24시간 감시하는 ‘특별감옥’이었다. 감시원의 눈을 피해 이희호씨에게 메모를 몰래 주고받는 방법을 알려줬다. 정권의 철저한 감시 아래서 필기구를 구하기 힘들어 볼펜 대신 못으로 껌종이, 과자 포장지 등에 글씨를 꾹꾹 눌러 썼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감옥에서 가족들과 주고받은 편지와 메모를 담은 <옥중서신>이 두 권으로 출간됐다. 1984년 나온 <김대중 옥중서신> ‘완결판’이다. <옥중서신>은 <김대중 옥중서신>에서 공개하지 못했던 편지와 메모가 추가됐다. 1권의 핵심은 1980년 사형선고를 받은 뒤 감옥에서 보낸 편지들이다. 편지에는 아내와 자녀들을 대하는 그의 남다른 사랑도 엿보인다. ‘이희호가 김대중에게’가 부제인 2권에는 거의 공개되지 않았던, 이희호씨가 보낸 편지가 수록돼 있다. 김 전 대통령의 민주주의에 대한 강한 신념을 담고 있는 <옥중서신>은 결코 감옥에 가둘 수 없었던 ‘민주주의의 노래’이기도 하다. /시대의창·각 권 2만2000원. 이충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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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동품 영화’ 명품의 향기
〈클래식 중독〉
‘1980년대 한국영화의 전위, 이장호 감독’ ‘<오발탄>과 영원한 모범생 영화학도 유현목 감독’ ‘스트레스사 한 히피 세대의 스타 하길종’ 등 차례의 소제목들을 어보면 초보자를 위한 한국영화사처럼 보인다. 그러나 막상 책을 펼치면 이야기책처럼 술술 읽힌다. 7년간 영화 기자와 영화잡지 편집장을 지낸 지은이의 필력과 호기심에 본디 이 글이 연재됐던 사이트의 특성이 더해져 딱딱한 정보의 나열 대신 에세이와 비평을 매끄럽게 오가는 색다른 맛의 글이 완성됐다.
지난 3년간 영상자료원장으로 이만희, 유현목, 김기영 등의 한국 고전 작품들을 만나면서 “이삿짐 싸다가 장롱 구석에서 까맣게 잊고 있던 저금통장을 찾아낸 기분이었다”는 조선희씨는 그 ‘저금통장’을 밑천 삼아 글을 썼다. 억압적인 시대에 기량껏 창작열을 불태울 수 없었던 하길종 감독 등을 소개할 때는 애석하게 단명한 천재에 대한 안타까움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동시대의 감독으로 많은 평론가들이 아직 평가를 유보하거나 주춤거리는 장선우 감독에 대한 지지를 또렷이 드러낸다. 특히 장선우 감독의 <꽃잎>이나 유현목 감독의 <카인의 후예> 등 주요 한국영화에서 언급되지 않는 작품의 재발견과 해설은 다른 영화비평집에서 보기 힘든 재미를 선사한다. 총 16편이 만들어졌던 <춘향전>의 각기 다른 판본들에 대한 다양한 비교나 ‘영화보다 더 영화처럼’ 살았던 신상옥·최은희 부부의 삶 등은 압축된 신문기사처럼 가벼운 읽을거리로도 흥미롭다. 에필로그에는 전 정권에서 임명된 문화부 산하 기관장 가운데 “거의 마지막에 남아 임기를 마치”면서 느끼는 소회나 3년간의 활동에 대한 냉정한 자기 평가를 기탄없이 털어놓았다. /마음산책·1만4000원. 김은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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휠체어 가로막는 ‘장애 사회’
〈장애학 함께읽기〉
“차별받기 때문에 장애인이 된다.” 2년 전 <차별에 저항하라> <당신은 장애를 아는가>를 출간한 뒤 언론과 한 인터뷰에서 김도현씨는 단호하게 말했다. 휠체어 때문에 버스를 탈 수 없는 사람, 계단을 오를 수 없는 사람을 장애인으로 만드는 건 저상버스와 엘리베이터를 설치하지 않는 사회 탓이다. 개인의 신체적·정신적 ‘손상’과 무언가를 할 수 없는 상태인 ‘장애’는 인과관계로 엮일 수 없다는 얘기다. 나아가 장애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차원의 문제라는 것이다.
<장애학 함께읽기>는 10년 넘게 장애인 인권운동가로 활동해온 김도현씨가 장애를 ‘사회적’ 문제로 파악해 연구하는 장애학을 본격적으로 소개한 책이다. 국내 최초로 장애학을 대중적으로 설명한 이론서라고 할 수 있다. 1부에서 지은이는 “왜 장애는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 개인화되고 의료화되는가?”라는 기본적 질문에서 시작해 사회적 장애이론을 개념화한 영국의 장애학자 마이클 올리버의 이론을 중심으로 장애학을 상세히 소개한다. 나아가 ‘신성한 노동’의 관념을 공유하는 자본주의와 마르크스주의를 넘어 ‘비노동적인 삶을 인정하는, 경제주의로부터 벗어난 사회’가 장애인이 진정으로 해방될 수 있는 사회임을 역설한다. 2부에서는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와 장애 정책, 신사회운동으로서의 장애 정치 등을 조망한다. 자신이 읽은 만큼, 소화한 만큼만 썼다는 지은이의 입말체 서술이 귀에 쏙쏙 들어온다. 그의 생각이 현장에서 무르익은 덕분일 것이다. 김도현 지음/그린비·1만2000원. 김일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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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길어올리는 ‘장인 정신’
〈천 번의 붓질 한 번의 입맞춤〉
구석기 유물 가운데 아슐리안형 주먹도끼라는 게 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동아시아에는 없다’는 게 정설이었다. 그런데 1977년 한탄강변의 연천 전곡리에서 아슐리안형 주먹도끼가 발견됐다. 이 일로 세계 고고학계가 뒤집어졌다. 첫 발굴 이후 30년이 넘게 지났지만, ‘전곡리 아슐리안형 주먹도끼’의 고고학적 위상을 해명하느라 아직도 논쟁중이다. 인류의 진화와 확산 과정을 밝혀줄 ‘물증’이기 때문이다.
한탄강변에서 지나던 이들의 발길에 차이던 이 주먹도끼의 ‘30만년 동안의 침묵’에 처음으로 말을 건 이는 동두천 주둔 미군 병사 그레그 보웬. 미국에서 고고학을 전공한 그가 이 ‘돌조각’을 발견해 서울대 김원용 교수에게 가져간 것이다. 조용한 시골 마을에 모여든 발굴단 총각들을 보려고 읍내의 아가씨들이 하이힐을 신고 5리 길을 걸어 식사를 배달해주는 진풍경도 연출됐다. 배기동 한양대 교수는 이 발굴에 참여하며 전공을 삼국시대에서 구석기시대로 바꿨고, 발굴 현장을 취재하던 기자를 아내로 맞이한 각별한 인연을 간직하고 있다. ‘고고학 발굴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은 <천 번의 붓질 한 번의 입맞춤>은 구석기시대에서 조선시대에 걸쳐 27곳의 유적 발굴에 얽힌 사연을 이건무 문화재청장 등 30명의 고고학자들이 대중적으로 풀어 쓴 글 모음이다. 땡볕에 쭈그려 앉아 호미질을 하다 발견한 유물이 다칠까봐 ‘천 번의 붓질’을 불사하는 고고학자들의 모습은 아름답다. 위장전입과 부동산투기 등 위법행위로 편안한 삶을 좇아놓고도 고관대작이 되려고 나선 장관 후보자들이 배워야 할 삶의 태도다. /진인진·1만2000원. 이제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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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팍한 ‘요리왕’의 인생역전기
〈고든 램지의 불놀이〉
<헬스 키친> <미션! 최고의 레스토랑> 등 케이블 방송 프로그램 덕분에 국내에서도 제법 유명한 스코틀랜드 출신 요리사 고든 램지의 팬이라면 눈이 반짝일 책이 나왔다. 그의 요리 인생의 도전과 성공을 다룬 자전적 에세이 <고든 램지의 불놀이>가 그것. 국외에서는 책 10여종이 펴내는 족족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됐지만, 한국에서 그의 책이 번역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지금은 영국, 두바이, 도쿄, 뉴욕 등 세계 각지에 자신의 이름을 건 식당과 펍 18곳을 연 재벌급 요리사지만, 어린시절은 알코올중독 아버지 덕분에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했단다. 열두 살부터 축구를 시작해 프로 입단을 제의받을 실력을 갖췄지만 잦은 부상과 가난 때문에 그만두고 요리사로 전향했다. 방송에서 눈물을 쏙 빼놓는 독설을 퍼붓는 공격적인 성격은 이런 환경과 이력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책은 “한마디로 똥구멍이 좀 덜 찢어지게 될 때까지 그런 변화가 어떻게 일어났는가에 대한 이야기”인 것이다.
과연 고든 램지는 어떻게 자신만의 요리 왕국을 건설했을까? “주위 사람들의 코를 납작하게 할 정도로 잘하고 싶었다. 누구보다 조금 나은 정도로는 절대 충분하지 않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결코 따라올 수 없는 최고의 경지에 올라야만 했다.” 그래서, 동료들이 근무 조건이나 근무 시간, 봉급에 대해서 불평할 때, 성격이 더럽기로 악명 높은 선배 요리사 아래서 시키는 건 뭐든 하고 쉬지 않고 일하며 충고란 충고는 모조리 빨아들였단다. 노진선 옮김/해냄·1만3000원. 강김아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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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괴한 도시 방랑, 그 결말은?
〈아무도 편지하지 않다〉
남자는 집을 떠났다. 자신의 집에는 현관에만 들어서도 발작이 일기 때문이었다. 그에게 평안을 주는 곳은 “사십오 평짜리 우리 집이 아니라 그 사십오평을 제외한 지구의 모든 땅덩어리”였다. 그는 애완견 한마리를 끌고 도시를 전전했다. 낯선 사람을 만나면 말을 걸었다. 친해지면 그들에게 순서대로 번호를 붙였다. 99는 길거리 껌딱지를 긁어모아 그림의 재료로 쓰는 화가였다. 불륜을 저지르는 어머니를 얼러서 쌍꺼풀 수술을 받으려는 여고생은 239,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갑자기 사라져버린 412, 자신이 쓴 소설을 지하철 객차를 돌며 파는 소설가는 751, 이런 식이었다.
매일 밤 그는 낯선 모텔에서 편지를 썼다. 편지의 대상은 그의 가족들과 길 위에서 만난 수많은 ‘숫자들’이었다. 다음날 아침에는 떠나온 집 앞에 사는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자신의 집으로 답장이 왔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답장이 오면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답장은 한 통도 오지 않았다. 그렇게 여행은 3년이나 계속됐다. 그의 긴 여행은 중간에 갑자기 끝나게 된다. 동행한 애완견이 원인이었다.
34살 소설가 장은진의 장편소설 <아무도 편지하지 않다> 속의 공간과 인물은 기이하다. 소설 속에서 이름이 붙여진 대상은 그의 형, 동생과 그가 묵는 모텔들뿐이다. 소설 마지막 즈음에서 별난 여행의 수수께끼가 풀린다. 소설가 서영채는 “나는 뻔히 속는 줄 알면서도 마음이 한번 휘청거렸다”라고 평했다. 제14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이다. /문학동네·9000원 김기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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