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깃발 아래에서〉
베네딕트 앤더슨 지음·서지원 옮김/길·2만5000원
<세 깃발 아래에서>는 <상상의 공동체>(1983)의 지은이인 정치학자 베네딕트 앤더슨(73·사진)의 2004년 저작이다. 이 책은 앤더슨을 세계적인 학자 반열에 올린 <상상의 공동체>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일종의 후속작이다. <상상의 공동체>에서 그는 근대 민족주의(내셔널리즘)가 18세기 말~19세기 초 라틴아메리카에서 출현해 유럽에서 발전했음을 입증함과 동시에 그 민족주의가 민족이라는 ‘상상의 공동체’를 결속해주는 문화적 접착제 구실을 했다고 주장했다. 후속작에서 앤더슨은 이렇게 형성된 민족주의가 19세기 후반에 동남아시아 식민지역에서 급속히 번지게 된 이유와 그 과정을 세계사적 시야에서 살핀다.
전작 <상상의 공동체>에서와 마찬가지로 앤더슨이 이 책에서 동남아시아를 주요 사례로 끌어들인 것은 그 자신의 출생 이력과도 관련이 있다. 1936년 아일랜드 출신 아버지와 잉글랜드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중국 윈난성에서 태어난 앤더슨은 어린 시절을 그곳에서 보냈다. 그를 키워준 보모는 베트남 출신 여자였다고 한다. 장성한 뒤 아버지가 다녔던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에 입학한 앤더슨은 21살 때 미국으로 건너가 코넬대학에서 정치학을 연구했다. 그 후 지금까지 이곳에 거점을 두고 인도네시아·타이·필리핀 지역 연구를 하고 있다. 특이한 것은 그가 여전히 아일랜드 국적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버지의 고향을 국적으로 간직한 것은 ‘상상의 공동체’에 대한 그의 어떤 애착을 암시한다.
제목에 쓰인 ‘세 깃발’은 이 책이 지닌 지역적 성격과 세계적 성격을 동시에 상징한다. 첫 번째는 스페인과 미국에 대항해 혁명 전쟁의 포문을 연 필리핀 지하운동단체 ‘카티푸난’의 깃발이며, 두 번째는 당시 유럽 급진주의 혁명운동을 주도하던 아나키즘의 검은 깃발이고, 세 번째는 스페인에 맞서 독립전쟁을 벌이던 시절부터 쓰인 쿠바의 깃발이다. 이 세 깃발은 필리핀 민족주의 운동이 유럽 아나키즘 운동, 나아가 쿠바의 반식민 독립운동과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 책의 부제 ‘아나키즘과 반식민주의적 상상력’은 그런 세계적 차원의 연결 지점을 가리킨다.
앤더슨 저작은 추상적인 개념 설명이 아닌 구체적인 사례 분석이 중심인데, 이 책에서는 사례 분석이 사실상 내용의 전부를 차지하고 있다. 필리핀 민족운동에 결정적 기여를 한 세 사람을 중심으로 삼아 유럽과 쿠바의 상황을 교직함으로써 사태의 전모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야기의 중심을 이루는 세 인물, 소설가 호세 리살, 인류학자·언론인 이사벨로 데 로스 레예스, 저항운동 조직가 마리아노 폰세는 모두 1860년대 초반에 태어나 19세기 말 이후 필리핀 민족주의 운동에서 핵심 구실을 한다. 이 세 사람 가운데 특히 호세 리살은 이 책의 사실상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다. 지은이가 필리핀 민족운동 지도자들을 앞세우는 것은 19세기 말 필리핀이 아시아에서 최초로 ‘민족주의 운동’을 일으킨 선구적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지은이는 이 민족주의 운동에 자극을 준 것으로 유럽 아나키즘을 지목한다. 아나키즘은 당시 경쟁 이념이었던 마르크스주의와 달리 농민에 대해 우호적이었고, ‘하찮고’ ‘몰역사적인’ 민족주의에 대한 편견도 품지 않았다. 억압적 지배질서에 대항해 싸울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환영했다. 초기의 민족주의자들은 아나키즘 운동에서 든든한 국제적 동맹군을 발견했던 것이다.
이 책의 주인공이라 할 호세 리살은 1861년에 필리핀에서 태어나 1882년 식민 종주국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로 유학한다. 그곳 마드리드대학에서 철학·문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귀국하지 않고 파리와 런던 등지에 머물며 의학을 공부하고 유럽의 지식인들과 지적·정치적으로 교류한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시기에 두 편의 소설을 썼다는 사실이다. 스페인어로 쓴 두 소설 <놀리 메 탕헤레>(1887)와 <엘 필리부스테리스모>(1891)는 “유럽 바깥에서 쓰인 최초의 선동적인 반식민 소설”이었으며, 당대 서구문학의 아방가르드 양식을 효과적으로 차용한 최정상급 작품이었다.
리살은 자신의 두 번째 소설에서 이렇게 쓴다. “스페인어를 하는 한 줌의 사람들이여, 스페인어로부터 무엇을 얻으려는가? 독창성을 죽이고, 다른 마음에 너희 생각을 종속시키고, 스스로를 자유롭게 하는 대신에 진짜 노예로 변질시키려는 것인가! 언어야말로 한 민족의 사상 그 자체인 것이다.” 리살의 소설들은 필리핀 현지로 들어와 반식민 민족운동의 상상력을 폭발시킨다. 1892년 필리핀으로 돌아온 리살은 4년 뒤 터진 반스페민 민족해방전쟁 과정에서 처형당한다.
지은이는 필리핀 민족운동 지도자들이 당시 일본·중국 지식인들과도 교류했음을 상세히 밝힌다. 특히 쑨원·량치차오·루쉰은 필리핀 민족운동의 영향을 직접 받았으며, 그들의 투쟁에서 영감을 얻었다. 옮긴이 서지원(오하이오대 정치학과 박사과정)씨는 해제에서 “국제주의 입장이 민족주의와 공존할 수 없는 것은 아님을 이 책은 무척이나 선명하게 증언하고 있다”고 말한다. 고명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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