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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관망하는 ‘중립 비평’ 한국선 설곳 없었다

등록 2009-08-05 22:39

<비평> 편집진의 느슨한 이념적 결속력과 ‘중도’라는 포지션이 갖는 절충주의적 한계는 독자들의 요구에 신속하게 대처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 요인이기도 했다. 사진은 왼쪽부터 김우창 편집인, 도정일·장회익·최장집 편집자문위원과 그동안 발행된 <비평>지들(아래). <한겨레> 자료사진
<비평> 편집진의 느슨한 이념적 결속력과 ‘중도’라는 포지션이 갖는 절충주의적 한계는 독자들의 요구에 신속하게 대처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 요인이기도 했다. 사진은 왼쪽부터 김우창 편집인, 도정일·장회익·최장집 편집자문위원과 그동안 발행된 <비평>지들(아래). <한겨레> 자료사진
1999년 창간뒤 23호 발간…올 여름호 이후 사실상 종간
‘참여’ 요구 높은 지성계서 ‘고급 지성지’ 제자리 못찾아
인문사회과학 계간 ‘비평’ 무기한 정간

중도 성향의 인문사회과학 계간지 <비평>이 2009년 여름호(23호)를 끝으로 무기한 정간에 들어갔다. 사실상의 종간이다. 이로써 문예지들이 장악하고 있는 한국 계간지 시장에서 종합지로는 <창작과비평> <문화과학> <황해문화> 정도만 남게 됐다.

1999년 창간호부터 <비평>을 발간해온 도서출판 ‘생각의나무’의 박광성 대표는 5일 “<비평>이 추구했던 ‘성찰’과 ‘보편’이란 가치가 계간지의 주 소비층인 고학력 30~40대 사이에 확고히 뿌리내리지 못한 것이 실패 요인”이라고 말했다. 여전히 ‘참여’와 ‘실천’에 대한 요구가 높은 한국의 담론시장에서 ‘관망자적 비판’에 치중했던 지식인 잡지 <비평>은 제자리를 찾기가 어려웠다는 얘기다. 실제 <비평>의 발행 부수는 창간 때부터 1000부를 넘지 못했다. 계간지의 손익분기점으로 여겨지는 3000부에는 턱없이 모자란 수준이다. 정기 구독자가 300명 정도에 그쳐 판매량의 부침도 심했다. 출판사 관계자는 “한 해에 수천만원씩 적자가 누적되는 구조였다”고 전했다.

이념적 정체성이 모호했다는 점도 <비평>의 장기 생존을 어렵게 한 요인으로 꼽힌다. <비평>의 정체성은 편집진의 면모에서 확인되는데, 김우창(편집인), 장회익·도정일·최장집(편집자문위원), 여건종(주간), 권혁범·김동윤·박명림·윤평중·임지현·정재서·정정호(편집위원) 등 편집진의 이념적 지향은 중도진보에서 중도보수까지 비교적 넓게 분포해 있었다. 하지만 느슨한 이념적 결속력과 ‘중도’라는 포지션이 갖는 절충주의적 한계는 독자들의 요구에 신속하게 대처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 요인이기도 했다. 이 점은 750부를 발행하는 계간 <진보평론>이 10년 넘게 꾸준히 발간되고 있는 사실에 견줘볼 때 확연히 드러난다.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은 담론시장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편집 전략의 한계를 꼬집었다. 인터넷 공론장의 확대로 담론 생산의 중심과 주체 모두가 변한 상황에서 ‘고급 지성지’라는 자기 굴레에 얽매여 대학에서 검증받은 엘리트 필자들의 글로 지면을 채우려다 보니 독자 대중과 적극적으로 소통하는 데 실패했다는 것이다.

<비평>의 종간을 한국 사회에서 ‘가치중립적 지식인’이 겪는 위상 하락과 연계 짓는 시각도 있다. 이택광 경희대 교수는 “<창작과비평>의 백낙청 교수가 그렇듯 김우창 교수는 사실상 <비평>의 ‘상징’이었다”며 “이런 점에서 <비평>의 좌절은 누구나 귀를 기울일 수 있는 ‘큰 어른’의 자리가 한국의 가파른 현실 속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준 사건”이라고 풀이했다.

<비평>은 23호를 내는 동안 적지 않은 이슈들도 생산했다. ‘세계화는 오늘의 세계에 무엇을 가져왔는가’를 특집으로 펴낸 2호(2000년 봄)는 피에르 부르디외, 앤서니 기든스, 노엄 촘스키 등 세계 석학들의 글을 실어 주목받았고, 15호(2007년 여름)부터 18호(2008년 봄)까지 연재한 김우창·도정일·최장집·장회익 교수와의 연속 대담도 독자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생각의나무는 내년 하반기쯤 새로운 계간지를 선보일 계획이다. 박광성 대표는 “<비평>보다는 진보적 색채가 분명한 잡지를 만들려고 한다”며 “<창작과비평>과 <녹색평론>의 장점을 살리면서 한층 젊고 실천적인 잡지를 통해 공적 담론지형에 기여할 방법을 찾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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