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책&생각

사막의 먼지 같은 ‘슬픈 오아시스’ 국가들

등록 2009-07-31 19:52

〈실크로드, 길 위의 역사와 사람들〉
〈실크로드, 길 위의 역사와 사람들〉




〈실크로드, 길 위의 역사와 사람들〉
김영종 지음/사계절·1만6500원

실크로드 관련서는 많다. 대중을 겨냥한 입문서부터 전문 학술서에 이르기까지, 한 해에 출간되는 것들만 10여 종에 이른다. 이 책들에서 다뤄지는 실크로드의 주역은 중국과 로마, 몽골 등 과거 실크로드의 경영권을 둘러싸고 쟁패했던 거대제국들이다. 역사가 ‘승자의 전리품’이라는 오랜 상식을 재확인시켜 주는 셈이다.

중앙아시아 연구가 김영종씨가 쓴 <실크로드, 길 위의 역사와 사람들>은 이런 ‘실크로드 산업’의 본류에서 비켜나 있다. 책의 주인공은 제국들 사이에 끼여 존망의 슬픈 역사를 되풀이해 온 오아시스 국가들인데, 이들은 누란, 대원, 대하, 오손, 월지 등의 이름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주류 실크로드사는 이들을 서사의 주역으로 호명하는 데 인색했다. 주류의 시선에 포착된 이들은 거대사의 흐릿한 풍경에 불과한, 사막의 먼지 같은 존재들이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실크로드의 역사를 약소 오아시스 국가의 관점에서 조망하는 이 책의 시도는 ‘풍경의 역사화(化)’로 불러도 무방하다. 글쓴이는 말한다. “약함은 생명의 온상이요, 상처 속에 우주가 있다.”

책이 말하는 실크로드는 흔히 생각하듯 교역의 산물이 아니다. 강대국들이 서로 이해를 다투는 과정에서 생겨난 ‘전쟁의 자식’이다. 동아시아로 한정한다면, 흉노·돌궐 등 북쪽의 유목제국과 남쪽의 정주제국인 중국이 충돌하는 과정에서 실크로드가 탄생했다는 얘기다.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한(漢) 무제 때 인물인 장건(?~기원전 114)의 서역원정이다.

장건은 흉노를 치기 위한 동맹을 맺기 위해 한 무제가 월지에 파견한 특사였다. 그런데 흉노에 붙잡혀 10년간 억류돼 있다가 탈출에 성공해, 중앙아시아의 오아시스 왕국인 대원, 강거를 거쳐 월지에 도착한다. 하지만 월지 왕을 설득하는 데 실패한 뒤 이웃 나라인 대하로 건너가 다시 한 번 동맹을 시도하지만 역시 실패한다. 이 과정에서 장건은 주변 오아시스 왕국들의 지리·정세·물산에 관한 정보를 수집했고, 13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온 장건은 보고 들은 정보를 황제에게 보고한 뒤 약간의 군사와 함께 막대한 금과 비단을 싣고 다시 중앙아시아로 떠난다. 이 과정을 책은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실크로드는 처음부터 무역과 문화 교류를 목적으로 개척된 길이 아니라, 흉노와의 항쟁 속에서 협공할 파트너를 찾아 떠난 결과 뚫린 길이다. 실크로드 형성의 축은 정주제국들 사이의 교역이 아니라 유목제국과 정주제국의 대립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강대국의 각축장이 된 대표적인 오아시스 국가가 누란 왕국이다. 유라시아 동서교통로의 요충에 위치한 까닭에 누란은 흉노와 한나라로부터 끝없는 침략과 간섭에 시달렸고, 훗날에는 월지가 인도로 이주해 세운 쿠샨제국의 속국이 된다. 이 과정에서 왕족들이 세 나라에 차례로 볼모로 끌려가는가 하면, 점령군에 의해 국호가 바뀌고 강제이주까지 당하는 비애를 겪는다.

책이 다루는 이야기는 이 밖에도 많다. 실크로드가 전성기를 구가했던 당(唐) 제국기 장안의 모습과 당시 실크로드 무역의 주역이었던 소그드 상인들, 로마제국의 붕괴를 초래한 실크로드 비단과 간다라 지방을 거쳐 중국, 한국, 일본까지 전파된 불상 양식에 얽힌 사연 등이 섬세한 이야기체 문장의 힘을 빌려 생생하게 전달된다.

주목할 만한 점은 글쓴이가 실크로드의 과거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가 강조하는 것은 ‘실크로드라는 역사체(歷史體)’의 현재적 의미다. ‘지금 우리에게 실크로드는 무엇인가.’ 글쓴이는 묻는다.

“전통적인 유목제국과 정주제국의 대립 구도는 19세기 영국·러시아의 그레이트 게임과 20세기 미·소냉전을 거쳐, 21세기 미·중 양강 체제로의 전환이 예상된다. 이런 상황은 실크로드의 역사적 의미가 현대의 한반도에 새로운 형태로 재현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누란 왕국과 같은 실크로드 약소국들처럼, 미래의 한반도도 생존을 위해 똑같은 줄다리기를 해야 하는 것일까.” 2004년에 나온 <반주류 실크로드사>의 개정판이다.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괴물이 되어서야 묻는다, 지금 내 모습을 사랑해 줄 수는 없냐고 1.

괴물이 되어서야 묻는다, 지금 내 모습을 사랑해 줄 수는 없냐고

구준엽 아내 서희원 숨져…향년 48 2.

구준엽 아내 서희원 숨져…향년 48

인상파 대가 오지호 명작 ‘사과밭’과 ‘남향집’의 엇갈린 뒤안길 3.

인상파 대가 오지호 명작 ‘사과밭’과 ‘남향집’의 엇갈린 뒤안길

“알고 보면 반할 걸”…민화와 K팝아트의 만남 4.

“알고 보면 반할 걸”…민화와 K팝아트의 만남

신학철 화백 “백기완 선생, 내면은 부드럽고 아름다운 분” 5.

신학철 화백 “백기완 선생, 내면은 부드럽고 아름다운 분”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