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랭 바디우 비판적 입문〉
제이슨 바커 지음·염인수 옮김/이후·1만6500원
알랭 바디우(사진)는 질 들뢰즈 사후 가장 주목받는 현존 프랑스 철학자다. 바디우가 주목받는 것은 들뢰즈로 대표되는 이른바 ‘탈근대 철학’의 퇴조와도 관련이 있다. 바디우는 탈근대 철학을 비판하고 전통철학의 주제를 복권하는 운동을 대표하는 철학자다. 영국의 탈마르크스주의 이론가 제이슨 바커가 쓴 <알랭 바디우 비판적 입문>은 바디우 철학을 영어권에 널리 알린 저작이다. 2002년에 이 책이 출간된 뒤 바디우의 명성은 프랑스 바깥으로 퍼졌으며, 바디우의 연구서들도 이후 잇따라 등장했다. 이 책에서 지은이는 바디우를 “헤겔 이후 가장 야심 찬 사상가이면서 루크레티우스 이후 최고의 유물론자”라고 평가한다.
이 책은 바디우의 기념비적 저작 <존재와 사건>(1988)을 몸통으로 삼아 바디우 사상의 출발점에서부터 그 발전 경로를 통시적으로 살핀다. 바디우는 1937년 모로코에서 태어나 파리고등사범학교에서 수학했으며, 루이 알튀세르 문하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68혁명’을 겪으면서 바디우는 정치 활동의 전면에 서는데, 특기할 것은 마오쩌둥주의를 받아들였다는 사실이다. 1970년 마오쩌둥주의 정치조직 건설에 참여한 그는 1970년대 내내 마오주의에 근거를 둔 철학적 에세이 3부작을 썼다.
이 시기는 프랑스에서 탈근대주의 철학운동이 맹위를 떨치는 때였는데, 바디우는 이 흐름을 거슬러 사유하고 실천했다. 이 사유가 최고조에 이르러 응결된 것이 대표작 <존재와 사건>이다. 바디우는 오늘의 시대를 소피스트의 시대라고 규정하고 자신을 둘러싼 탈근대 사상가들을 현대의 소피스트라고 이름 붙인다. 이 사상가들이 플라톤 시대의 소피스트들처럼 상대주의를 밀어붙임으로써 합리주의를 위기에 몰아넣고 사유의 기반을 무너뜨린다고 바디우는 비판한다. 진리를 부정하고 주체를 해체하는 탈근대 사상에 맞서 진리를 수호하고 주체를 복원하는 일이야말로 자신에게 부여된 임무라는 것이 바디우의 철학적 작업 바탕에 깔린 생각이다.
흥미로운 것은 탈근대 철학 흐름을 강력하게 비판하는 바디우가 그 철학 흐름의 대표자라 할 들뢰즈를 적극 인정하고 그를 대화 상대자로 삼고 있다는 사실이다. 들뢰즈가 죽고 난 뒤 출간한 <들뢰즈-존재의 함성>(1997)이 바로 그런 경우인데, 여기서 바디우는 들뢰즈를 독특하게 재해석함으로써 자신의 철학을 지지하는 밑돌로 삼아 버린다. “들뢰즈를 무한하게 차이를 만들어내는 차이의 철학자라고 간주하는 통상적인 해석”과 아주 다른 들뢰즈가 바디우의 들뢰즈다. 바디우는 들뢰즈가 차이들만으로 이루어진 다양체의 세계, 다시 말해 ‘아나키즘적 욕망’의 세계를 찬양하는 듯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 차이들을 아우르는 ‘전일자’(하나인 전체)를 미리 상정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들뢰즈는 ‘하나인 전체’를 전제하고서 차이를 이야기하는 사람이지, 어떤 동일성도 거부하는 차이의 철학자는 아니라는 것이다. 바디우의 비판을 통해 들뢰즈는 일종의 플라톤주의자로 재탄생한다.
들뢰즈 비판에서 보이듯, 바디우는 탈근대 사상가들을 단순히 부정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소피스트들의 비판을 변증법적으로 소화해 소피스트들을 넘어서는 것이 바디우의 방식인 셈이다. 그런 사유가 잘 나타나 있는 것이 ‘진리’와 ‘주체’라는 주제다. 바디우에게 진리는 ‘복수의 진리’이며 주체는 ‘출현하는 주체’다. 이 점에서 바디우는 전통철학의 혁신자로 평가받는다. 전통철학은 진리들 사이의 위계를 따져 최고 진리의 총체적 지배를 승인한다. 그런 진리는 진리의 독재, 진리의 폭정으로 떨어지기 쉽다. 탈근대 철학자들이 진리를 부정한 것은 실상 진리의 폭력적 지배를 부정한 것이다.
여기서 바디우는 ‘복수의 평등한 진리들’을 이야기한다. <존재와 사건>에서 바디우는 진리가 생산되는 영역으로 정치·과학·예술·사랑이라는 네 영역을 지목한다. 여기서 생산되는 진리들은 위계질서 없이 서로 평등하다는 것이다. 철학은 여기서 생산되는 진리를 사유하는 학문을 가리킨다. 바디우는 우리 시대에 진리를 다시 세움으로써 새로운 플라톤이 되고자 한다.
바디우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지점이 이 진리가 생산되는 과정이다. 그 과정은 ‘사건’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진리는 사건을 통해 생산된다. 이때의 사건이란 기존 사회질서를 교란하고 균열시키는 예기치 못한 사태의 돌발이다. 이 사건은 기존의 지배적 관점에서 보면 규정할 수 없고 명명할 수 없는 ‘결정 불가능한 것’이다. 기존 사회의 이해 지평을 벗어난 사태가 바디우가 말하는 사건이다. 과학에서 지동설의 등장이나 상대성 이론의 등장은 기존 과학 체계로서는 해석할 수 없는 사태다. 마찬가지로 정치에서 프랑스혁명이나 러시아혁명은 기존 사회가 수용할 수 없는 사태다. 이런 상황에서 새로운 사태를 ‘진리’로 인식하고 결정하는 행위가 바디우가 말하는 ‘개입’이다. 그리고 이 개입을 통해 그 결정을 충실하게 밀어붙이는 과정에서 주체가 출현한다. 진리를 진리로 받아들여 실천하는 과정에서 주체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 주체의 활동이 역사를 만든다고 바디우는 말한다.
고명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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