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준하 평전〉
김삼웅 지음/시대의창·1만6900원
1975년 8월17일 저녁 서울 면목동 장준하의 집에 함석헌·계훈제·백기완 등 재야의 명망가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한때 최대 발행부수를 자랑하던 잡지사 사장을 지냈고 국회의원까지 역임한 ‘재야 대통령’의 초상집이었지만 조문객들에게 내놓을 양식거리도, 변변한 술안주도 없었다. 조문객들은 비좁은 전셋집 대신 골목길에 멍석과 신문지를 깔고, 십시일반 추렴해 사온 라면과 소주로 사흘 밤낮을 지새웠다. 장준하의 죽음, 사람들은 그것을 일러 ‘순교’라고 했다. 그에게 조국은 “종교요, 신앙이요, 님이요 그 모든 것”이었던 까닭이다.
<장준하 평전>은 ‘민족이 신앙이자 모든 것’이었던 장준하의 일대기를 문헌자료와 지인들의 진술, 글쓴이의 체험과 기억을 통해 복원한 책이다. 책을 쓴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은 장준하의 57년 생애를 이렇게 요약한다.
“민족이 식민지가 됐을 때는 총을 들고 왜적과 싸웠고, 조국이 해방됐을 때는 붓을 들고 청년과 학생들에게 민주주의 사상을 가르쳤다. 군사독재에 헌정질서가 짓밟히자 붓을 던지고 거리로 나서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 싸웠다.”(67쪽)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 정치인이자 민주화 운동가로서 만인의 귀감이 되는 삶을 산 장준하지만, 이 책은 장준하의 밝고 위대한 면만을 부각하지 않는다. 비평(評)하여 전한다(傳)는 평전의 목적에 충실하게, 그의 생에 드리운 그늘과 사상적 한계까지도 균형 있게 조명하고 있다.
글쓴이가 꼽는 장준하의 첫 번째 실수는 해방정국에서 백범과 결별하고 이범석의 휘하로 들어간 것이다. 책은 “광복군 시절의 인연이 있다고는 하지만, 이승만 독재체제에서 일역을 담당한 이범석 밑에서 일한 것은 장준하의 패착이었고, 본인도 이것을 인정했다”(303쪽)고 적었다.
장준하는 감내하기 어려운 고통과 수난 속에서도 평정심과 미소를 잃지 않았다. 사진은 <사상계> 대표시절의 장준하. 시대의창 제공
1950~60년대 보여준 경직된 대북관과 통일관 역시 한계로 꼽힌다. 글쓴이는 “당시 쓴 글이나 그가 발행한 <사상계>의 논조를 보면 대결주의적 북한관과 반공논리로 일관되고 있다”(505쪽)고 꼬집는다. 5·16 직후 <사상계>의 권두언과 편집후기를 통해 혁명에 대한 기대감을 밝힌 대목이나, 유신체제에서 국회의원에 출마해 쓴잔을 마셨던 것 역시 “박정희 집단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내린 서툰 선택일 수 있다”(509쪽)는 게 글쓴이의 평가다.
하지만 이런 한계는 그가 박정희 정권과 대결하는 과정에서 하나하나 극복된다. 여기엔 유신이라는 독재체제의 등장이 전환점으로 작용했다. 큰 기대를 걸었던 ‘7·4 남북공동성명’이 남북 권력자들의 체제 강화에 이용되고 폐기되는 과정을 목도하면서, 장준하는 엘리트 운동의 한계와 민주주의와 통일의 주체로서 민중의 존재를 새롭게 바라보게 된 것이다. 글쓴이는 이것을 “단재 신채호가 국권이 기울어져갈 때 영웅사관에 따른 민족영웅론에서 민중직접혁명론으로 의식이 바뀐 것처럼 장준하도 민중 속으로 내려오고 그들 속으로 뛰어들었다”(508쪽)고 기술한다.
아직도 풀리지 않은 장준하의 죽음을 둘러싼 의혹에 대해선 “실족사를 가장한 모살(謨殺) 가능성”을 제기한다. 그 근거로 글쓴이는 ‘사고’를 당하기 전 장준하가 보여준 행적을 꼽는다. 실제 장준하는 포천 약사봉 아래서 숨진 채 발견된 1975년 8월17일을 며칠 앞두고 30년 넘게 보관해 온 중경(충칭)임시정부의 태극기를 대학 박물관에 기증하는가 하면, 아내와 갑자기 천주교식 혼례의식을 치르고, 백범 묘소와 망우리에 있는 부모의 묘소를 찾아 참배했다. 뭔가 중대한 일을 앞둔 사람처럼 신변 정리를 서둘렀다는 얘기다. 그 ‘중대한 일’이란 무엇이었을까.
“광복 30주년을 앞두고 평소에 잘 드나들지 않던 김대중을 은밀히 만났으며, 원효로의 함석헌을 찾았고, 광주 홍남순 변호사와 무등산을 등반했다. 8·15를 기해 무엇인가 중대한 거사 준비를 서두르다가 김영삼 신민당 총재가 동남아 여행에서 돌아온 뒤인 20일경으로 연기하였다. 거사는 재야의 대표적 민주인사들이 나서 민주헌정질서로 복귀할 것을 요구하고, 시민불복종운동을 전개하는 내용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36~37쪽)
<사상계>에 가해진 박정희 정권의 치밀한 고사 작전(456~462쪽)은 책을 통해 처음으로 드러난 부분이다. 1965년 박정희 정권은 국세청 직원 수십명을 동원해 본사는 물론 인쇄소·제본소·광고주·지방서적상까지 찾아가 이 잡듯이 뒤진 끝에 거액의 추징금을 부과한다. 또 거래은행에 지시해 담보물 공매를 강요하는 한편, 편집위원과 저명한 필자들을 ‘정치교수’로 묶어 대학에서 추방하는 전방위 압박을 가한다. 결국 ‘동지’들은 하나둘씩 발을 뺐고, 한때 10만부까지 발행했던 지성지 <사상계>는 급격한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오늘날 한국 언론계에서 벌어지는 치밀하고 집요한 ‘재갈 물리기’를 장준하와 <사상계>는 40여년을 앞서 경험했던 셈이다. 이를 두고 글쓴이는 말한다.
“장준하가 대결하고 청산하고자 했던 것들이 다시 현재화되고 있다. 교묘한 언론 길들이기, 권위주의 강화, 대결 양상을 띠는 남북관계, 어용 지식인과 언론인들의 반시대적 칼춤…. 새삼 ‘장준하 정신’이 그리워진다.”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