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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한국 근대문학의 척추’ X레이 찍다

등록 2009-06-19 19:41수정 2009-06-19 19:42

‘한국 근대문학의 척추’ X레이 찍다
‘한국 근대문학의 척추’ X레이 찍다
임화 탄생 100돌 기념 전집 출간
단편서사시·민족-이식문학론 등
지울수 없는 높이와 한계 보여줘




〈임화문학예술전집 1~5권〉
임화 지음·임화문학예술전집 편찬위원회 엮음/소명출판·3만1000~4만7000원

“오오, 적이여 너는 나의 용기다.”

1936년 잡지 <삼천리>에 28살의 임화(1908~1953·사진)는 자신의 묘비명을 내걸었다. 식민지 지식인에게는 시대 자체가 적이었다. 그는 도처에서 적을 보았다. 생활의 적, 문학의 적, 이념의 적이 압도했다. 그는 적을 용기라고 부름으로써 현실의 위력을 버텨내는 힘을 얻고자 했다. 그러나 역사는 그가 걸어간 길이 비극으로 끝났음을 보여준다. 임화의 삶은 그대로 근대소설 주인공의 삶, 다시 말해 자기 운명을 시험하는 문제적 개인의 격투다. 시인이자 혁명가였던 임화는 존재 자체로 한국 근대문학사의 척추를 이룬다. 그를 빼놓으면 우리 근대문학사는 주저앉아 버린다.

그가 태어난 지 100여년, 그리고 ‘월북 문인’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난 지 20여년 만에 그의 문학 전체를 아우르는 ‘임화문학예술전집’이 출간됐다. 문학전문출판사 소명출판(대표 박성모)이 기획하고 국문학자 김재용·임규찬·신두원·하정일·류보선 교수가 편찬위원으로 참여해 10년 만에 이루어낸 지난한 작업의 성취다. 임화 작품은 1988년 해금된 뒤 간헐적으로 출간된 바 있으나, 문학예술 전집이 꾸려지기는 남북한을 통틀어 이번이 처음이다. 이 전집 가운데 임화 문학의 몸통이라 할 <시> <문학사> <문학의 논리> <평론1> <평론2>가 먼저 나왔고, 그의 산문과 자료를 모은 나머지 세 권이 올해 안에 나올 예정이다. 전집에 들어간 작품들은 꼼꼼한 원문 확인 작업을 거쳐 현대어에 가깝게 다듬었고, 세세한 주석을 달았다.

임화
임화
혁명운동에 참여한 지식인 임화의 모습을 빼놓고 보더라도, 임화의 활동 영역은 넓었고 그가 쌓은 성채는 높았다. 창작·비평·이론에서 두루 당대 최고 수위의 성취를 보여준 전방위 작가가 임화였음을 이 전집은 보여준다. 그 가운데 시인 임화의 전모를 수합한 것이 제1권 <시>다. 1926년 10대 후반에 쓴 소박한 서정시에서부터 한국전쟁 시기에 쓴 무훈시들까지 그가 쓴 모든 시들이 담겼다. 다다이즘에 이끌린 초기를 지나 혁명적·계급적 내용의 시를 쓴 카프(KAPF·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활동 시기, 일제의 탄압에 밀려 내면으로 잠복해 암투하던 시기, 그리고 해방 뒤 활동성이 다시 폭발하던 시기의 시들이 삶의 파노라마를 그려낸다. 특히, 카프 맹원이 돼 스무 살 무렵에 쓴 <네거리의 순이> <우리 오빠와 화로>에서, ‘단편 서사시’라는 장르를 개척한 임화의 창조적 재능을 확인할 수 있다. “오빠의 강철 가슴 속에 박힌 위대한 결정과 성스러운 각오를 저는 분명히 보았어요.”(<우리 오빠와 화로>) 계급적 각성과 혁명적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데는 이야기 형식의 시가 제격이라고 판단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임화는 시인으로서 창작의 최전선에서 활동했을 뿐만 아니라, 문학이론가로서도 지울 수 없는 족적을 새겼다. 1930년대에 구축한 리얼리즘론과 해방 후 제출한 민족문학론은 반세기 후에 남한에서 부활했고, 여전히 불꽃이 꺼지지 않은 현재형의 이론으로 남아 있다. 창작방법론으로서 리얼리즘에 관해 임화는 이렇게 썼다. “리얼리즘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것이다. 그러나 주의할 것은 현실이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부단히 변하고 발전하며 소멸하는 긴 과정임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의 리얼리즘론은 ‘프롤레타리아 리얼리즘’ ‘변증법적 사실주의’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을 거치면서 단련한 창작 방법론이었다. 편집위원들은 임화의 리얼리즘론이 당대의 서구 이론에 견주어도 결코 뒤지지 않는 수준에 도달했다고 평가한다.

해방공간에서 임화는 당면한 시대적 과제를 문학으로써 실천할 방법론으로 ‘민족문학론’을 내놓았다.(‘조선 민족문학 건설의 기본과제에 관한 일반보고’) “우리 민족의 모어로 표현되고 우리 민족의 사상·감정을 내용으로 한 조선문학이 제국주의 지배하에서 순조로이 발전할 수 없었음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그는 민족문학이 한 민족을 통일된 민족으로 형성하는 민주주의적 개혁과 그것을 토대로 한 근대국가 건설 없이는 수립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근대적 민족문학이 성립하려면 전근대적(‘봉건적’) 질서를 해체하는 작업이 앞서야 하는데, 일제의 강점 때문에 이 낡은 질서가 온존됐으며, 따라서 이 전근대적 질서를 혁파하는 작업을 완수하여 근대적 민족국가를 수립하는 데 이바지하는 것이 이 시기 문학의 임무라는 것이 임화의 논리였다. 민족문학론은 민주주의에 입각해 통일민족국가를 세운다는 정치적 주장의 문학적 판본이었다.

〈임화문학예술전집 1~5권〉
〈임화문학예술전집 1~5권〉
임화의 이론적 활동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조선 신문학사 연구다. 1940년을 전후로 해 집중적으로 이루어진 이 연구는 ‘이식문학론’이라는 악명 높은 논리를 대들보로 삼고 있다. 이식문학론의 핵심은 조선 신문학의 모든 형식이 서구에서 수입돼 이식된 것이라는 주장에 있다. “(조선의) 신문학사는 서구적 문학의 이식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이식문학론의 ‘악명’은 우리 근대문학의 자주적 형성 가능성을 부정했다는 사실에서 기인할 뿐만이 아니라 그 논리를 극복하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에서도 기인한다. 근대문학의 성립은 근대 시민정신의 등장과 근대 시민국가의 건설을 조건으로 한다고 임화는 지적한다. 그런 근대성을 성취하지 못한 채 식민지가 된 탓에 신문학이 왜곡과 혼란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창작과 이론에서 두루 임화가 이루어낸 업적은 단순히 역사의 한 장면으로 끝나지 않고, 현재적 생명력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이야말로 임화를 오늘에 불러내는 이유라고 편집위원들은 말한다. “이 작업을 하면서 우리 엮은이들은 예술의 역사란 걸작의 역사이며, 결코 실패작과 범작의 역사가 아니라는 에즈라 파운드의 말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임화의 성취는 한국 근대문학이 다다른 높이이자 한계였음을 이 전집은 보여준다.

시인→문학이론가·영화배우→혁명가→간첩죄 처형

임화의 비극 같은 일생

임화의 길지 않은 일생은 조숙한 시적 정신이 시대의 격랑을 만나 요동치다 난파하는 과정을 드라마틱하게 보여준다. 그는 ‘모던 보이’로 시작해 혁명가로 살다가 ‘민족 반역자’로 삶을 마쳤다.

1908년 서울 낙산 밑 소시민 가정에서 태어난 임화(본명 임인식)는 13살에 보성중학에 들어갔으나 학업을 다 마치지 못하고 17살에 중퇴한 뒤 가출한다. 그는 자신의 성장 배경과 가족관계를 한번도 털어놓은 적이 없는데, 가출할 무렵 집안이 파산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26, 7년께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다. 다다이즘에 기운 시를 쓰던 그가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에 가입해 계급혁명적인 시를 쓰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그를 끌어주었던 사람이 선배 시인 박영희였다. 박영희는 뒷날 카프를 탈퇴한 뒤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요 잃은 것은 문학이다”라는 말을 뱉었는데, 임화는 박영희의 전향을 줄곧 비판한다. 빠른 속도로 좌익 문학 이론을 흡수한 임화는 스무 살 무렵 카프의 주요 이론가로 등장하고 선배 이론가들의 논리를 격파하며 조직의 지도자가 된다. 동시에 이 시기에 영화배우로 데뷔해 <유랑>과 <혼가>의 주연을 맡는다. 이런 이력 때문에 임화는 카프 작가의 이미지보다는 영화배우 이미지로 더 알려졌으며, ‘조선의 발렌티노’라는 별명을 얻었다.

1930년 임화는 현해탄(쓰시마해협)을 건너 도쿄로 유학을 떠나 1년 뒤 돌아온다. 임화는 뒷날 쓴 <현해탄>이란 시에서 이렇게 심중을 표현했다. “아무러기로 청년들이 평안이나 행복을 구하여 이 바다 험한 물결 위에 올랐겠는가? 청년들은 늘 희망을 안고 건너가 결의를 가지고 돌아왔다.” 문학평론가 김윤식 교수는 <임화연구>에서 도쿄라는 선진 도시로 유학가는 임화의 심리를 ‘현해탄 콤플렉스’라는 말로 요약하면서, 그 현해탄 콤플렉스가 ‘이식문학론’으로 나타났다고 썼다. 1932년 임화는 24살로 카프 서기장이 되지만, 일제 경찰의 카프 탄압에 밀려 1935년 조직 해산서를 제출한다.

문학사 연구로 후퇴한 임화는 1945년 8·15 해방과 더불어 다시 활동의 전면에 등장한다. 이때 시 <9월12일-1945, 또다시 네거리에서>를 발표했다. 그는 이 시를 “원컨대 용기이어라”라는 문장으로 끝낸다. 역사의 소용돌이가 그의 삶을 휘몰아가기 시작한 시절에 그는 용기를 갈구했으나, 시대는 그의 편이 아니었다. 1947년 월북한 그는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짐과 동시에 인민군과 함께 서울로 내려왔다. 그때 <너 어느 곳에 있느냐-사랑하는 딸 혜란에게>를 쓰는데, 이 시가 뒤에 그의 처형의 빌미가 된다. “가슴이 종이처럼 얇아 항상 마음 아프던…” 따위의 시구가 패배주의 감정과 투항주의 사상을 설교한다는 이유였지만, 실상은 한국전쟁 실패의 책임을 박헌영의 남로당파가 뒤집어쓸 때 붙은 구실이었다. 박헌영 노선을 따랐던 임화는 1953년 8월6일 ‘미제 간첩’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고명섭 기자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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