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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석궁재판’ 법치주의 실태를 전하다

등록 2009-06-19 19:11수정 2009-06-19 19:12

〈부러진 화살〉
〈부러진 화살〉




〈부러진 화살〉
서형 지음/후마니타스·1만2000원

2007년 1월15일 저녁 6시30분 전 성균관대 수학과 교수 김명호는 자신이 낸 교수지위 확인소송의 항소심 재판장인 서울고등법원 박홍우 부장판사의 아파트를 찾았다. 1층 엘리베이터 입구에서 퇴근하는 박 판사와 마주친 김 교수는 화살이 장전된 석궁을 들고 “항소를 기각한 이유가 뭐냐”고 따져물었다. 잠시 뒤 화살이 발사됐고, 아파트 경비와 운전기사에 제압당한 김 교수는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 연행됐다.

사건 직후 대법원은 “재판 결과에 불만을 품고 재판장 집에 찾아와 흉기를 사용해 테러를 감행했다”고 발표했다. “법치주의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라는 대법원장의 발언과 “법치주의가 흔들리면 국가 질서도 혼란에 빠지게 된다”는 전국법원장회의의 담화가 잇따랐다. 그런데 여론은 법원 기대와는 반대로 흘러갔다. 사건을 보도한 인터넷 기사에는 “법치주의? 똥 싸고 자빠졌다” “나도 석궁을 쏘고 싶었다”는 댓글이 이어졌다.

<부러진 화살>은 “원칙대로 고집스럽게 살면서 주변에 적당히 사는 사람들을 괴롭게 만드는 ‘성질 깐깐한 한 수학자’가 벌인” 대한민국 법원과의 전투 기록이다. 책을 쓴 전문 인터뷰어 서형씨는 3대 권력기관(청와대·국회·대법원) 앞에서 1인시위를 벌이는 사람들을 인터뷰하다 ‘1인시위계의 전설’이 된 김 교수를 뒤늦게 만났다. 석궁사건에 대한 7차 공판이 진행되던 시점이었다.

글쓴이가 지켜본 공판은 한 편의 부조리극이다. 피고인 신분의 김 교수가 판사와 검사를 향해 “법을 지켜라” 하고 호통치는가 하면, 재판장은 피해자 박 판사에 대한 변호인의 신문을 수시로 가로막는다. 피고인에겐 공공연한 경멸감을 표출하면서 박 판사에게는 깍듯하게 대하는 검사나, 부장판사를 지낸 사람이 맞을까 싶을 만큼 진술에 일관성이 없는 박 판사, 재판중임에도 문을 박차고 나가거나 소리를 질러대는 방청객들 역시 이해하기 어렵긴 마찬가지다.

원고 쪽이 밝힌 사건 전모 역시 석연찮은 구석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박 판사의 복부에 난 상처는 1.5m 거리에서 쏜 화살을 정통으로 맞았다고 보기엔 턱없이 경미하고, 재판부에 제출된 증거품 가운데는 박 판사가 맞았다는 ‘부러진 화살’이 사라지고 없다. 박 판사의 겉옷과 내복에 남아 있는 핏자국이 와이셔츠에는 없는 점, 확보된 혈흔이 박 판사의 것이 맞는지조차 확인하지 않은 부실 수사도 의혹만 키울 뿐이었다. 그런데 증거의 부실함을 지적하며 박 판사에 대한 추가 신문과 혈흔 감정이 필요하다는 김 교수의 요청을 재판장은 모두 기각한다. 김 교수는 결국 항소심에서도 징역 4년을 선고받고, 대법원 확정판결을 거쳐 교도소에 3년째 수감중이다.

글쓴이는 석궁 재판을 사실상의 징벌 재판으로 규정한다. 재판의 부당성을 고발하며 판사의 실명이 적힌 피켓을 들고 1인시위를 벌이는가 하면, 판사를 석궁으로 위협하고 재판정에서도 법조항을 들이대며 재판부의 오류를 조목조목 지적하는 겁 없고 불손한 피고인에 대한 ‘법조 카르텔’의 집단보복이란 얘기다.


사건 당사자인 김 교수와 주변 인물은 물론, 현직 부장판사와 법원 직원, 나아가 유사한 사법 피해자들과 사건을 취재한 언론인과의 인터뷰를 통해 사건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을 입체적으로 조명했다. 항소심 재판장과 김 교수의 법정공방을 속기록 형태로 정리한 5장은 대한민국 사법부의 문제점을 실감나게 보여주는 현장 르포로도 손색이 없다.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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