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고한 죽음’은 공동체를 깨운다
〈아름다움의 미학과 숭고함의 예술론〉
김수용 지음/아카넷·1만5000원 요한 크리스토프 프리드리히 폰 실러(1759~1805)는 요한 볼프강 폰 괴테와 더불어 독일 고전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다. 독문학자 김수용 연세대 명예교수가 쓴 <아름다움의 미학과 숭고함의 예술론>은 실러의 고전주의 작품 바탕에 깔린 미학에 대한 연구서다. 지은이는 학부 시절부터 실러에 열광해 졸업논문과 석사학위 논문을 모두 실러를 주제로 삼아 썼다고 한다. 이 책은 40여 년에 걸친 실러 공부의 결산임과 동시에 실러에 관한 이렇다 할 연구서가 없는 국내 학계에 주는 노학자의 선물이기도 하다. 지은이는 연전에 <괴테 파우스트 휴머니즘>을 펴낸 바 있다. 괴테 연구서에 이어 실러 연구서를 씀으로써 ‘바이마르 고전주의’에 대한 연구를 매듭지은 셈이다. 실러의 일생은 박해·가난·질병의 고난 위에서 이루어진 영광의 삶이었다. 22살 때 완성한 <군도>를 만하임 극장에서 상연함으로써 ‘질풍노도 문학’의 중심으로 떠오른 그는 이 작품이 만하임 영주의 분노를 사자 그곳을 탈출했다. 가난 속에서 극작에 매진하던 그는 폐결핵으로 투병하면서 대표작인 비극 <발렌슈타인>을 썼다. 46살로 짧은 삶을 마쳤을 때 그의 몸은 만신창이였다. 주검 내부의 여러 장기는 아주 심하게 손상돼 있었으며, 어떤 장기는 녹아서 그 흔적만 남아 있었다고 한다. 실러의 몸을 부검한 의사는 “이 가엾은 사람이 이렇게 오래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것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라는 소견을 남겼다. 강한 정신과 의지가 육체의 병마를 견뎌내는 힘이었던 것이다. 독일 고전주의 작가 ‘실러’ 40년 연구
박해·질병 속 피어난 작품·미학 조명 “비극은 왜 도덕적 의식을 높이는가”
예술의 교육적 힘에 대한 무한 찬미 그의 강렬했던 삶만큼이나 실러 문학은 후대의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 됐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실러는 독일 문학 사상 가장 큰 숭배를 받은 시인이자 가장 격한 비판의 대상이 된 시인이었다. 1859년 실러 탄생 100돌을 기점으로 하여 실러 숭배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의 삶과 문학이 신화적 아우라에 둘러싸였고, 거의 종교적 차원의 찬양 대상이 됐다. 이런 과도한 숭배 현상은 20세기에 들어와 강력한 반작용에 부닥쳤다.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히틀러의 강제수용소의 정신적 근원이 바이마르 고전주의에까지 이르고 있다”고 확언했다. 또 실러의 이상주의 예술론은 예술을 현실 도피의 장으로 만든 주범으로 단죄됐다. 그러나 지은이는 숭배와 거부 모두 일방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아름다움의 미학과 숭고함의 예술론〉
그렇다면 실러의 미학에서 아름다움과 숭고함은 어떻게 구분되는가. 아름다움은 육체와 정신, 감각과 이성이 온전히 조화를 이룬 상태를 가리킨다. 사회·역사적 차원에서 보면, 유토피아적 이상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 아름다움이다. 실러는 이 아름다움을 이념으로 제시하기는 했지만 그 아름다움이 현실에서 그대로 실현될 수는 없다고 보았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아름다움은 ‘규범적 이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상이 곧바로 실현될 수 없는 현실을 설명하는 미학적 이념이 숭고함이다. 숭고함이란 화산 폭발이나 폭풍우 같은 거대하고 위압적인 자연현상 앞에서 느끼는 감정이다. 압도적인 자연의 힘에 두려움을 느끼는 인간이 자신의 자유 의지로써 두려움을 이겨낼 때 얻게 되는 것이 숭고함의 감정이다. 죽음이야말로 숭고함이 드러나는 장소다. 죽음이 피할 수 없는 일로 다가올 때, 그 공포에 짓눌리지 않고 죽음을 자신의 자율적 의지로 선택하는 도덕적 자살 혹은 순교, 이것이 숭고함이다. “모든 것을 파괴하고 다시 창조하는, 파멸의 두렵고도 장대한 광경”인 역사를 배경으로 삼아 숭고함은 공동체적 현상으로 드러난다. 모순·대립·분열·갈등에 휩싸인 세계에서 비극적 사건으로 출현하는 것이 숭고함이다. 실러는 숭고함이 인간의 공동체 의식을 고양하는 기능을 한다고 말한다. 숭고함을 체험함으로써 인간은 이기적 충동을 억제하고 자기 내부의 도덕적 의지를 일깨울 수 있다는 것이다. 지은이는 실러가 말하는 숭고함의 이 기능이 바로 예술이 담당해야 할 교육적 기능이라고 설명한다. ‘역사의 끔찍함’이라는 비극적 현실을 숭고함 속에서 인식함으로써 아름다움의 이상을 지향하게 만드는 것이 예술의 교육적 힘이라는 것이다. 지은이는 이렇게 예술의 교육적 성격 안에서 아름다움과 숭고함이 서로 연결될 수 있다고 말한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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