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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절반 허파의 완주, 허리디스크의 동행

등록 2005-05-19 16:45수정 2006-02-06 20:20

현장 속 현장

거북이 부부 마라톤에 빠졌다.

남편은 4시간56분49초, 아내는 5시간7분25초.

허파 한쪽 없는, 명퇴뒤 무기력하던

남편은 자신감을 찾았다.

병치레 잦은 아내는 42.195 끝에서

펑펑 눈물로 약한 자신을 씻어냈다.


그의 닉네임은 ‘거북이’다. 아니 그냥 거북이가 아닌 ‘느린 거북이’다.

원래 천천히 땅을 기어가는 만사태평인 게 거북이인데, 보통 거북이보다 더 느린 거북이라니…. 일단 별로 빠르지 않은 인물이라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하다.

마라톤 입문 4년, 그동안 풀코스 12번, 하프코스 24번을 뛰었으니 ‘마라톤에 미친’, 그야말로 마라톤광(狂)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왜 굳이 ‘느린 거북이’라는 닉네임을? 말 그대로 느리기 때문이다.

풀코스 최고 기록이 4시간 56분49초. 아마추어 마라토너라면 첫 풀코스 도전할 때 낼 수 있는 기록. 아마도 그 정도의 경력이면 3시간대 기록인 이른바 ‘서브-4’를 거쳐 보스턴 마라톤 출전 자격인 3시간 30~40분대 기록을 보유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런데 그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 즐겁게 달린다. 이 정도 달리는 것도 남들은 ‘기적’이라고 한다. 그것은 그의 나이가 환갑을 넘긴 61살이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에게는 달리는데 필요한 산소를 공급하는 허파가 한쪽만 있다. 10대 학창시절 늑막염을 앓아 한쪽 폐는 ‘늑막 유착’으로 흔적만 남았다.

의사들은 허파가 한쪽밖에 없으면 산소 흡입률이 정상인의 60%에 그친다고 한다. 두개 허파를 갖고도 돌연사의 공포 때문에, 온몸의 근육이 피로에 허덕이며 고통스러워 하는 것이 싫어 마라톤을 멀리하는 것이 ‘정상’인데 한개의 허파로 마라톤을 하는 그는 차라리 미련한 거북이라 해야 할지 모른다.

실제로 그와 함께 달려 보았다. 달리면서 이것 저것 물었다.

마라톤 입문 3년에 8번의 풀코스를 완주한 기자는 그의 답변보다는 그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역시 힘든 소리가 난다. 건강하고 힘찬 ‘헉헉’소리라기 보다는 중간에 새는 듯한 ‘새엑-색’에 가까운 소리다.

남들 절반의 배기량을 가진 엔진을 달고, 30㎞ 지점의 ‘마라톤 벽’을 극복하며, 42.195㎞라는 결승점을 통과하면 항상 그의 부인이 기다리고 있다. 그의 옆을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며 매니저 구실을 하던 부인도 이제는 마라토너다. 입문 1년차.

그동안 5번의 풀코스 완주와 7번의 하프코스 완주를 했다.

첫 풀코스 완주였던 지난해 3월의 인천마라톤 대회 때는 50살 여성 연령별 1위를 차지했다. 상장도 받았다. 여자 완주자 51명 가운데 47등을 하며 5시간 7분25초의 기록으로 결승점을 통과했다. 여성 참가자 가운데는 가장 고령 완주자가 됐다.

그런데 그도 남편처럼 몸이 정상이 아니다. 허리디스크 환자다. 이미 두차례 수술을 받았고, 한달 이상 입원하기도 했다. 또 오른쪽 엄지 발가락 탈골증 환자이기도 하다. 겉으로 보기에도 엄지 발가락 아랫뼈가 튀어 나왔다. 그래서 볼이 큰 사이즈의 운동화를 신는다. 또 발가락끼리 마찰이 유난히 심해 한번 풀코스를 뛰면 물집이 생기고, 그 물집이 터져 피가 나와 운동화가 붉게 변하곤 한다.

그런데도 뛴다. 이제는 남편보다 기록이 빠르다. 수영도 잘 하는 그는 내친김에 철인경기 출전도 꿈꾸고 있다.

이 비정상인 부부의 마라톤 인생.

무엇이 이 두사람을 달리게 했을까?

‘나는 달린다’는 책을 써 세계적인 마라톤 전도사의 역할을 했던 요슈카 피셔 독일 외무장관은 112㎏가 되는 체중을 줄이기 위해 달렸다. 결국 75㎏의 날씬한 몸매를 갖게 된 피셔는 달리기 전엔 “달리기를 한번도 좋아한 적이 없다. 그 소모적이고 지루하고 매력 없는 운동을 왜 하는지 이해가 안됐다”고 말했다.

1952년 헬싱키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을 목에 건 ‘인간 기관차’ 에밀 자토펙은 “물고기는 헤엄치고, 새는 날고, 인간은 달린다”는 말로 달린다는 원초적 몸짓에 가치를 부여했다.

그 의문을 풀기 위해 서계만-동정자 부부의 보금자리를 찾았다.

일산 호수 공원이 멀리 보이는 아파트.

깔끔한 거실 한켠에는 두 사람의 달리는 모습을 담은 액자가 눈에 띈다. 응접실 테이블 아래에는 지난해 서씨의 환갑 식사 때 참석자들에게 나눠준 기념 수건이 곱게 접혀져 놓였다. 수건 아래쪽에는 두 사람의 달리는 모습을 인쇄해 놓았다.

서재 한쪽 벽에는 두 사람이 마라톤 참가때 마다 받아온 완주 메달 40여개가 주렁주렁 달려 있다. 일반 운동선수 장식장과 다른 점이라면 우승 트로피 같은 요란한 장식물이 없다는 점이다.

우선 서씨에게 물었다.

“왜 달리기 시작했나요?”

잠시 얼굴이 어두워진다.

“1999년 6월 평생 직장이던 한국통신을 명예퇴직한 뒤 거의 2년을 그냥 쉬었지. 그런데 옛 직장 후배가 마라톤대회 출전을 하며 내 허락없이 내 이름을 올려 놓은 거야. 마라톤의 ‘마’자로 모르던 나였는데…. 허파가 한쪽 없는 놈이 뛸 생각을 했겠어?”

평생 산은커녕 나지막한 언덕에 올라도 헉헉거렸다. 그러나 후배 얼굴을 봐 일주일 정도 연습하고 하프마라톤에 출전, 2시간 38분의 기록으로 꼴찌를 했다. 그러나 그와 가족들은 환호했다. 해냈다는 성취감과 자신감에 눈물을 흘렸다. 평생 그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이번에는 부인에게 물어 보았다.

답변은 썰렁했다. 그 대회 참가 기념품이 달리기 점퍼였는데 좋아 보였고, 주변에서 남편과 같이 입고 다니면 좋을 것 같다기에 신청했다는 것이다. 천안에서 열린 대회였는데, 그냥 기념품만 타고 달릴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현장에서 주변 사람들이 강권하는 바람에 그냥 평상복에 번호표만 달고 뛰었다.

“달리다가 힘들면 회수차량을 타라고 하더군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하프는 회수 차량도 없었던 거예요. 후반에 지쳐서 화장실로 들어갔어요. 기다리는 사람이 많이 그냥 화장실 안에 퍼대 앉아 쉬었어요. 포기한 셈이죠. 10여분 뒤 나갔는데, 마라톤 클럽 후배 분들이 계속 지키고 있는 거예요.”

그 고마운 회원들 덕분에 하프를 완주했다. 걷기도 불편한 환자가. 그때부터 남편의 마라톤 동료가 되었다. 일산호수마라톤클럽에서 함께 일주일에 세번씩 달렸다.

드디어 첫 풀코스 도전. 지난해 3월 인천마라톤대회였다. 반환점까지는 잘 달리던 부인은 30㎞가 넘어서며 ‘마라톤 벽’과 싸워야 했다. 몸에 축척해 놓은 글리코겐이 다 소진이 되며 육체는 더 이상의 노동을 거부했다.

“그 힘든 순간을 어떻게 극복했어요?”

“두 아들의 이름을 불렀어요. 아들들이 그 힘든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 나는 집에서 편하게 살았다는 미안함이 항상 있었어요. 부끄럽기도 했고요. 내가 완주를 하면 애들이 힘들 때 용기를 낼 것이라고 생각한 거죠. 그래서 아주 아주 힘들어서 길바닥에 쓰러졌을 때 두 아들의 이름을 불렀어요.” 눈에 눈물이 고인다.

결국 부인은 결승점에 들어왔다. 남편과 아들, 며느리, 손자들에게 둘러싸여 쓰러졌다. 그리고 펑펑 울었다.

“왜 그런지 몰라요. 지금 생각하니 창피해요. 그런데 막 눈물이 나왔어요.”

부인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함께 울었던 남편은 마라톤 동호회 인터넷 사이트에 이렇게 썼다.

“시집와서 박봉을 이겨내며 두 아이를 제왕절개 수술로 낳았고, 20대 젊은 나이에 디스크로 한달간 입원했던 당신…. 좌골 신경통에 엄지발가락 탈골로 걷기도 힘든 당신이 고통을 호소하며 괴로워할 때는 차라리 마라톤 신청을 하지 말 걸, 하며 후회도 했고…. 대회 3일을 앞두고 6㎞ 연습하고 와선 탈진해 주방 바닥에 쓰러져 하루종일 맥을 못추다가 영양제주사를 맞고 겨우 기운을 차리던 당신….”

구구절절 망부가(望婦歌)는 계속된다.

지난 3월 동아마라톤에 출전한 부인을 응원하려고 자신의 출전을 포기한 남편은 서울 시내 곳곳에 응원단을 배치했다. 20㎞지점의 구의역에는 자신이, 25㎞지점의 잠실역에는 작은 아들(서범강 30)을, 30㎞지점의 올림픽 공원에는 큰아들(서현강 33)을, 결승점에는 두 며느리(장은주 민유화)가 응원하도록 했다. 그런데 구의역 부근에서 처음 마주친 부인은 헉헉대면서 “박카스, 박카스 줘요”라고 소리쳤다. 평소 박카스를 즐겨 마시던 부인이 무의식적으로 찾은 것이다. 다급해진 남편은 휴대폰으로 작은아들에게 박카스를 준비하라고 ‘지시’했고, 부인은 다음 접선 장소에서 박카스를 마실 수 있었다.

“달리니까 좋아요?”

서씨는 눈을 반짝였다. “처음에는 건강을 위해 뛰었는데, 이제는 마라톤 클럽 회원들과의 정에 끌려 그만들 수 없어요. 직장생활 땐 경쟁심 때문에 때로는 살벌함도 느꼈지만, 직업에 상관없이 서로 존경하고 살펴줘 너무 편하고 좋아요.”

클럽 맏언니인 동씨는 “젊은이들과 어울리니 나이 먹는지 몰라요”라며 “호호호” 웃었다.

나이와 신체 조건을 뒤로 하고 부부가 함께 뛰며 즐겁게 사는 이들을 보며 클럽의 한 여자 후배는 부부의 이름을 운으로 이런 헌사를 인터넷 게시판에 남겼다.

서서히 시작한 사랑

계속 릴레이 되어 이어지네

만기일 인생이 끝날 때까지

동고동락하며

정성을 서로에게 쏟으시는

자손대대 자랑하고픈 부부의 사랑.

그들의 사랑이 부럽다.

이길우 스포츠부 기자 nihao@hani.co.kr, 사진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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