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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스승 뒤에 숨어 있던 플라톤의 육성

등록 2009-04-17 22:24

〈편지들〉
〈편지들〉
노년기 편지 13통 원전 최초 번역
정치철학 밑돌된 생애 궤적 드러나
〈편지들〉
플라톤 지음, 강철웅·김주일·이정호 옮김/이제이북스·1만3000원

<편지들>은 플라톤(기원전 427~347·그림 왼쪽)의 육성이 담긴 유일한 1차 자료다. 플라톤 전집을 번역하고 있는 정암학당이 이 편지들을 우리말로 옮겨 펴냈다. 희랍어 원전을 대본으로 삼은 최초의 한국어 번역본이다.

이 책은 모두 13편의 편지 묶음이다. 내용상 60살 이후 노년기 플라톤이 이 편지의 주인공이다. <편지들>이 그동안 번역이 안 된 것은 플라톤 전집의 체계적 번역 작업이 없었던 탓도 있지만, 플라톤 저작 중 위작시비에 가장 오래 시달린 탓도 있다. 후대의 사람들이 플라톤의 권위를 빌려 편지를 위조했다는 주장이 가시지 않았다. 그러나 긴 시간 문헌학자들의 면밀한 검증 작업을 거쳐 이 가운데 상당수가 진짜인 것으로 판정이 났다. 특히 일곱째 편지는 예외없이 진품으로 본다.

이 일곱째 편지가 중요한 것은 다른 편지들보다 월등하게 분량이 많을뿐더러 내용도 풍부하기 때문이다. 이 편지에는 플라톤 자신이 철학에 입문하게 된 이유와 자신의 정치철학 주장의 체험적 근거가 밝혀져 있어, 일종의 간략한 자서전 구실을 한다. 플라톤은 이 편지들 말고 수십 편의 대화편을 썼지만, 자기 스승 소크라테스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탓에 플라톤 자신의 육성을 들을 수 없다. <소크라테스의 변명>에 두 번, <파이돈>에 한 번, 자기 이름이 슬쩍 언급될 뿐이다. 살아 있는 인간 플라톤은 대화편에서 철저하게 침묵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플라톤의 편지들은 그의 생애를 추적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자료 구실을 해 왔다.

이 일곱째 편지를 보면, 젊은 시절 플라톤에게 강한 정치 참여 열정이 있었음이 분명히 드러난다. “난 내가 나 자신의 주인이 되면 (성인이 되면) 곧바로 나라의 공적 활동에 뛰어들겠노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결심은 머잖아 환멸로 끝난다. 조국 아테네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스파르타에 패배한 뒤 들어선 ‘30인 과두제’의 참혹한 학정을 겪고, 그 뒤 30인 체제를 뒤엎고 복귀한 민주파가 스승 소크라테스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것을 목격한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처음엔 공적 활동에 대한 열정이 넘쳐흘렀으나 그런 것들을 바라보면서 급기야 현기증을 느꼈습니다.” 그런 체험 속에서 플라톤은 “올바르고 진실되게 철학하는 사람들이 권좌에 오르거나 아니면 권력자들이 신의 도움을 받아 진정 철학을 하기 전에는 인류에게 재앙이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삶의 방향을 정치에서 철학으로 틀고, 이후 긴 시간 나라 바깥을 여행했다.


스승 뒤에 숨어 있던 플라톤의 육성
스승 뒤에 숨어 있던 플라톤의 육성
그 여행 중에 들른 곳이 시칠리아의 그리스 식민도시 시라쿠사였다. 시라쿠사는 아테네·스파르타에 이어 신흥 제국으로 발돋움하고 있었다. 기원전 387년 시라쿠사에서 플라톤은 참주 디오뉘시오스 1세의 처남인 디온을 만나게 된다. 당시 디온은 명민하고 열성적인 스무살 청년이었는데, 그에게서 플라톤은 ‘철인 정치가’의 싹을 발견한다. 디온과의 교유는 플라톤의 마음을 들뜨게 했다. 그러나 그 만남이 훗날 플라톤의 삶을 구렁에 빠뜨리는 계기가 됐다. 20년 뒤 디오뉘시오스 1세가 죽고 아들 디오뉘시오스 2세가 참주 자리를 이어받았다. 플라톤은 두 차례 디오뉘시오스 2세를 방문한다. 한 번은 디온의 요청으로, 다른 한 번은 디오뉘시오스 2세 자신의 요청으로 이루어진 방문이었다. 플라톤은 디오뉘시오스 2세를 잘 가르쳐 훌륭한 군주로 만들어보자는 기대를 품었으나, 두 차례 방문은 모두 참담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디오뉘시오스 2세는 숙부인 디온을 추방했고, 플라톤도 위태로운 지경에 빠져 겨우 살아돌아왔다. 그 뒤 디온은 시라쿠사를 참주의 학정에서 해방시키겠다며 군사를 일으켰다. 시라쿠사는 내전에 휘말려들었고, 기원전 353년 디온은 측근에게 살해당했다.

일곱째 편지는 바로 이즈음에 플라톤이 죽은 디온의 친척과 동지들에게 보낸 편지다. 이 편지의 1차적인 목적은 수신인들에게 정치적 조언을 하는 것이지만, 그 과정에서 플라톤은 디온과 관련된 자신의 체험을 상세히 이야기하고, 특히 디온과 공유했던 정치적 이상을 설파한다. 그가 이 편지에서 말하는 가장 좋은 정치는 “최선의 법에 따라 살아가는 자유인의 삶”을 보장하는 정치다. 노예가 아닌 자유인의 삶을 살되, 그 삶이 ‘최선의 법’의 지배를 받는 것이다. 여기서 법의 지배, 곧 법치는 전제정의 분별없는 ‘인치’와 대립한다. 법이 왕 노릇을 하는 입헌주의 체제가 플라톤이 현실적 방안으로 제시하는 좋은 정치의 모습인 셈이다. 이런 주장은 ‘철인왕’의 조건을 강조하던 중기 저작 <국가>에서 법치를 강조하는 말기 저작 <법률>로 이행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 편지는 공개 해명의 성격도 지니고 있다. 당시 플라톤은 디오뉘시오스에게 연루된 일로 참주정을 옹호한다는 의심을 사고 있었다. 그런 오해를 씻으려는 의도가 이 편지에 담겨 있는 것이다. 플라톤은 명확한 어조로 참주정에 대한 혐오감과 적개심을 드러낸다. 그런데도 이런 오해는 20세기에 카를 포퍼가 플라톤을 전제정치 옹호자로 본 데까지 이어졌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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