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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부자 감세론’에 숨은 중산층 몰락 원리

등록 2009-02-13 20:10수정 2009-02-13 20:12

미국의 속옷 브랜드 빅토리아 시크릿의 뉴욕 매장에 전시된 ‘팬터지 브라’. 값이 1000만달러에 육박하는 이 보석 브래지어는 수백만 고객의 참조틀을 변화시켜 100달러짜리 속옷이라도 기꺼이 선물하도록 동기를 유발한다.   창비 제공
미국의 속옷 브랜드 빅토리아 시크릿의 뉴욕 매장에 전시된 ‘팬터지 브라’. 값이 1000만달러에 육박하는 이 보석 브래지어는 수백만 고객의 참조틀을 변화시켜 100달러짜리 속옷이라도 기꺼이 선물하도록 동기를 유발한다. 창비 제공
〈부자아빠의 몰락〉
로버트 프랭크 지음·황해선 옮김/창비·1만1000원



‘지출의 연쇄작용’이 과소비로 이어져
허영 아닌 지위경쟁 “불가피한 선택”

소득 불평등과 맞물려 삶의 질 악화
저축동기 강화하는 누진소비세 주장

‘부자아빠 시리즈’를 연상시키는 대중적 표제를 달았지만, 영문판 원제목은 대단히 추상적이다. ‘폴링 비하인드’(Falling Behind). “뒤처지다, 추월당하다”라는 뜻과 함께 “(지급 등이) 늦어지다, 체납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폴 비하인드’의 동명사형인데, 직역하면 ‘낙오하기’ ‘연체하기’쯤이 되겠다. ‘우아한 루저’가 되는 법이나 ‘효과적인 먹튀’의 비급을 전수하는 실용서도 아닐진대, 무슨 책이름이 이처럼 구리고 우울한가.

〈부자아빠의 몰락〉
〈부자아빠의 몰락〉
<부자아빠의 몰락>을 쓴 로버트 프랭크는 벤 버냉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과 함께 경제교과서 <경제학 원론>을 집필한 일급 경제학자이자 <뉴욕 타임스>에 ‘경제의 현장’이란 고정 칼럼을 연재하는 경제분석가다. 신자유주의 시스템의 불평등 메커니즘을 고발한 <승자독식사회>의 공동 저자로도 알려져 있다. 그가 이 책 <부자아빠의 몰락>에서 던지는 문제는 단순하다. “중산층은 왜 붕괴하는가.”

프랭크에 따르면 중산층 위기의 가장 큰 원인은 자신의 소득 능력을 넘어서는 과도한 소비다. 과소비는 이른바 ‘지출의 연쇄작용’ 때문에 발생하는데, 그 메커니즘을 프랭크는 이렇게 설명한다.


“부자들의 늘어난 지출은 부자에 가까운 이들이 필요하거나 갖고 싶어하는 것을 규정하는 참조틀을 변화시켜 더 많이 지출하게 만든다. 부자에 가까운 이들의 지출이 늘어나면 이번에는 바로 그 아래 사람들의 참조틀이 달라지고, 그렇게 소득 사다리의 가장 낮은 단계까지 내려간다.”

이런 지출연쇄는 자연스런 사회현상이지만, 문제는 소득 불평등이 확대되는 상황에선 그 부정적 효과가 커진다는 점이다. 소득이 크게 늘어난 부자들이야 흥청망청 돈을 써도 타격이 없지만, 소득이 쥐꼬리만큼 늘어난 중산층에겐 터무니없이 커진 씀씀이가 부채 증가와 삶의 질 하락으로 귀결하기 때문이다.

지출연쇄의 부정적 효과를 보여주는 전형적 사례가 주택이다. 60평 빌라에 살던 ㄱ의 대학 동창이 스톡옵션을 행사해 마련한 돈으로 90평 주상복합으로 옮겨갔다. 90평 주상복합은 이제 주택에 대한 ㄱ의 인식에 ‘참조틀’이 되는데, 그때부터 ㄱ에겐 안락하던 자신의 40평 아파트가 비좁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ㄱ은 결국 빚을 내 60평 아파트로 이사한다. 이런 현상이 계층의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면서 사람들의 평균 거주 공간이 넓어진다. 미국의 경우 새로 짓는 주택의 건축면적 중간값이 1980년에 45평이었지만, 20년 뒤엔 60평으로 커졌다. 이 기간 중위가계의 실질소득이 거의 변동이 없었음은 물론이다.

사람들이 주택의 규모에 민감한 건 집이 가진 ‘지위재’적 속성에서 비롯된다. 집의 위치와 크기는 거주자의 재산 정도와 그에 상응하는 사회적 지위를 드러낸다. 자동차도 마찬가지다. 지위재의 특징은 ‘절대적 가치’보다 ‘상대적 가치’가 중요하다는 점이다. 모두가 배기량 1500시시 자동차를 타는 동네에서 혼자 1700시시 자동차를 굴리는 것이, 모두가 2500시시 자동차를 타는 동네에서 자기만 2000시시 자동차를 모는 것보다 선호되는 이치다.

하지만 글쓴이는 지위재와 관련된 지출연쇄가 단순한 ‘질투’나 ‘허영심’의 표출이라기보다 ‘지위 경쟁’에 내몰린 사람들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일례로 지역의 재산세와 긴밀하게 연관된 미국 공립학교의 질을 고려할 때, 자녀를 ‘평균 수준의 학교’에라도 보내기 위해선 빚을 내 비싼 주택으로 옮기는 수밖에 없다. 자동차나 의류에 대한 지출 역시 마찬가지다. “어느 정도 적절한 옷을 입고, 적절한 자동차를 몰고, 적절한 이웃과 사는 것은 어떤 사람이 적절한 직업을 얻고 큰 계약을 성사시키는 데 도움을 준다”는 것이다. 문제는 불평등이 가중시키는 ‘지위재’에 대한 과다 지출이 가계 압박을 가중시킬 뿐 아니라, 여가·건강·보험 같은 ‘비지위재’에 대한 소비를 축소시켜 삶의 질을 악화시킨다는 점이다. 실제 글쓴이가 인용한 통계 자료들은 소득 불평등이 노동·통근시간, 질병·사망·자살률 등과 비례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난국을 타개할 방법은 무엇인가.

과소비가 허영과 낭비욕 같은 비합리적 정념 때문이라면 이성과 윤리에 호소하면 된다. 그러나 과소비가 ‘지위’를 둘러싸고 벌이는 ‘전사회적 경쟁’의 산물이라면 사정은 달라진다. 그것을 제어하려면 모든 게임 참가자의 선택에 영향을 주는 보편적 수단을 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글쓴이가 제안하는 것은 조세정책이다. 누진율을 높이되 ‘소득’이 아닌 ‘소비’에 세금을 매기라는 것이다. 누진소득세의 경우 높은 한계세율이 저축과 투자의 동기를 약화시키지만, 많이 지출할수록 세액이 늘어나는 누진소비세는 저축 동기를 강화하기 때문이다. 글쓴이는 여기서 나오는 추가저축이 투자를 자극하고 성장을 촉진할 뿐 아니라, 다른 영역의 지출연쇄를 축소함으로써 ‘밑바닥을 향한 경주’를 멈출 수 있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2007년 출간된 이 책은 부유층 감세와 복지지출 감소로 특징지어지는 조지 부시 행정부의 조세·재정정책에 대한 맹렬한 비판이다. 글쓴이는 말한다. “미국의 경제현상에 영감을 받아 쓴 것이지만 그 내용은 시장경제를 채택한 어디서나 직접적으로 관련된 이야기다. 그 대부분은 매우 강한 경쟁력을 갖춘 한국 경제에서도 매한가지일 것이다.”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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