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코스트, 유럽 유대인의 파괴 1·2〉
〈홀로코스트, 유럽 유대인의 파괴 1·2〉
라울 힐베르크 지음·김학이 옮김/개마고원·1권 4만2000원, 2권 3만8000원 가해자 메커니즘으로 본 ‘홀로코스트’
“일상에 매몰·순응·체념이 학살 동력돼” “현존하는 가장 위대한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 연구서”로 꼽히는 <홀로코스트, 유럽 유대인의 파괴>의 원제는 ‘유럽 유대인의 파괴(The Destruction of the European Jews)’다. 500만명 넘게 희생된 인류사의 비극을 ‘파괴’라는 건조한 언어로 기술했으니, 피해자인 유대인들이 반발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이 책이 출간된 1961년, 미국과 이스라엘의 시온주의자들은 책과 저자를 향해 분노와 저주를 퍼부었다. 그러나 책을 쓴 라울 힐베르크 역시 유대인이다. 힐베르크가 ‘파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그는 학살을 기획하고 실행한 주체보다, 그 과정의 철저한 기계성과 익명성에 주목했다. 히틀러나 나치당이 아니라, 기계적 합리성을 원리 삼아 작동하는 독일 관료제와 조직화된 독일 사회 전체에 비극의 책임을 묻고자 했던 것이다. 힐베르크에 따르면 반유대주의 정책과 행동은 나치가 집권한 1933년에 비로소 나타난 것이 아니다. 시작은 4세기 로마였다. 이후 개종·추방·학살이라는 세 종류의 반유대인 정책은 유럽 역사를 통해 반복됐다. 나치 역시 처음에는 추방과 배제를 택했다. 당초 계획은 유대인들을 아프리카의 마다가스카르 섬으로 이주시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벌인 전쟁 때문에 장거리 대량수송이 불가능해지자 ‘유대인 문제’는 다른 방식으로 해결돼야 했다. 학살이었다. 힐베르크는 유대인 파괴가 세 단계로 진행됐다고 본다. 먼저 유대인의 개념이 ‘정의’됐고, 다음엔 유대인들이 게토로 ‘집중’됐다. 마지막 단계는 유대인의 ‘절멸’이었다. 정의와 집중 사이에 ‘약탈’이 끼어들었고, 집중과 절멸 사이에는 ‘노동착취’가 개입했다. 그런데 이 과정은 치밀한 마스터플랜에 의해 진행된 게 아니었다. “파괴과정은 한 단계 한 단계 실행된 작전이었고, 행정은 한 단계 앞 이상을 내다볼 수 없었다.”
중요한 것은 파괴가 어느 한 기관의 주도로 이루어진 게 아니었다는 점이다. 힐베르크가 볼 때, 그것은 ‘파괴기계’라는 ‘집합적 총체’에 의해 실행됐다. 이 기계는 행정기구와 군, 기업, 나치당이라는 독일의 주요 기관들로 구성됐는데, 평범한 독일인 누구라도 그 기관의 부속이 될 수 있었다. 나아가 힐베르크는 유대인 자치기구와 학살센터의 유대인 노동대, 저항 없이 가스실로 향한 유대인들까지도 파괴기계에 포함시킨다. 이들의 순응과 체념이야말로 학살을 지극히 저렴하고 효율적으로 만들어준 동력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많던 유대인의 이웃들은 다 어디에 있었나. 힐베르크에 따르면 그들 대부분은 일상에 몰두하며 중립을 지켰다. 그것은 위험도, 도덕적 부담도 지지 않으려는 일종의 전략적 선택이었다. 힐베르크는 말한다. “희생자에 대한 도움을 막은 것은 무엇보다 자아 몰두였다. 공포와 트라우마에 시달릴 때조차 사람들은 정상적인 삶의 외관에 매달렸다. 파블로 피카소는 계속해서 그림을 그렸고, 장 폴 사르트르는 극본을 썼다. 그들처럼 고상한 야망이 없는 사람들은 영화와 스포츠와 술로 향했다.” 말하자면 악은 일상의 도처에 있었다. 일상적인 관료행정과 일상적 생계활동, 그리고 일상적 자아실현에. 그 일상은 불타는 가자시티를 구경하며 환호하는 홀로코스트 유대인의 후손들과, ‘팔레스타인 잔혹극’이 방영중인 텔레비전 앞에 앉아 ‘모진 이웃’ 만나지 않았음에 안도하며 위안받는 우리들의 삶에서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라울 힐베르크 지음·김학이 옮김/개마고원·1권 4만2000원, 2권 3만8000원 가해자 메커니즘으로 본 ‘홀로코스트’
“일상에 매몰·순응·체념이 학살 동력돼” “현존하는 가장 위대한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 연구서”로 꼽히는 <홀로코스트, 유럽 유대인의 파괴>의 원제는 ‘유럽 유대인의 파괴(The Destruction of the European Jews)’다. 500만명 넘게 희생된 인류사의 비극을 ‘파괴’라는 건조한 언어로 기술했으니, 피해자인 유대인들이 반발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이 책이 출간된 1961년, 미국과 이스라엘의 시온주의자들은 책과 저자를 향해 분노와 저주를 퍼부었다. 그러나 책을 쓴 라울 힐베르크 역시 유대인이다. 힐베르크가 ‘파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그는 학살을 기획하고 실행한 주체보다, 그 과정의 철저한 기계성과 익명성에 주목했다. 히틀러나 나치당이 아니라, 기계적 합리성을 원리 삼아 작동하는 독일 관료제와 조직화된 독일 사회 전체에 비극의 책임을 묻고자 했던 것이다. 힐베르크에 따르면 반유대주의 정책과 행동은 나치가 집권한 1933년에 비로소 나타난 것이 아니다. 시작은 4세기 로마였다. 이후 개종·추방·학살이라는 세 종류의 반유대인 정책은 유럽 역사를 통해 반복됐다. 나치 역시 처음에는 추방과 배제를 택했다. 당초 계획은 유대인들을 아프리카의 마다가스카르 섬으로 이주시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벌인 전쟁 때문에 장거리 대량수송이 불가능해지자 ‘유대인 문제’는 다른 방식으로 해결돼야 했다. 학살이었다. 힐베르크는 유대인 파괴가 세 단계로 진행됐다고 본다. 먼저 유대인의 개념이 ‘정의’됐고, 다음엔 유대인들이 게토로 ‘집중’됐다. 마지막 단계는 유대인의 ‘절멸’이었다. 정의와 집중 사이에 ‘약탈’이 끼어들었고, 집중과 절멸 사이에는 ‘노동착취’가 개입했다. 그런데 이 과정은 치밀한 마스터플랜에 의해 진행된 게 아니었다. “파괴과정은 한 단계 한 단계 실행된 작전이었고, 행정은 한 단계 앞 이상을 내다볼 수 없었다.”
중요한 것은 파괴가 어느 한 기관의 주도로 이루어진 게 아니었다는 점이다. 힐베르크가 볼 때, 그것은 ‘파괴기계’라는 ‘집합적 총체’에 의해 실행됐다. 이 기계는 행정기구와 군, 기업, 나치당이라는 독일의 주요 기관들로 구성됐는데, 평범한 독일인 누구라도 그 기관의 부속이 될 수 있었다. 나아가 힐베르크는 유대인 자치기구와 학살센터의 유대인 노동대, 저항 없이 가스실로 향한 유대인들까지도 파괴기계에 포함시킨다. 이들의 순응과 체념이야말로 학살을 지극히 저렴하고 효율적으로 만들어준 동력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많던 유대인의 이웃들은 다 어디에 있었나. 힐베르크에 따르면 그들 대부분은 일상에 몰두하며 중립을 지켰다. 그것은 위험도, 도덕적 부담도 지지 않으려는 일종의 전략적 선택이었다. 힐베르크는 말한다. “희생자에 대한 도움을 막은 것은 무엇보다 자아 몰두였다. 공포와 트라우마에 시달릴 때조차 사람들은 정상적인 삶의 외관에 매달렸다. 파블로 피카소는 계속해서 그림을 그렸고, 장 폴 사르트르는 극본을 썼다. 그들처럼 고상한 야망이 없는 사람들은 영화와 스포츠와 술로 향했다.” 말하자면 악은 일상의 도처에 있었다. 일상적인 관료행정과 일상적 생계활동, 그리고 일상적 자아실현에. 그 일상은 불타는 가자시티를 구경하며 환호하는 홀로코스트 유대인의 후손들과, ‘팔레스타인 잔혹극’이 방영중인 텔레비전 앞에 앉아 ‘모진 이웃’ 만나지 않았음에 안도하며 위안받는 우리들의 삶에서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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