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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대한민국 정당성’ 논쟁 진보 안에서 점화

등록 2008-12-17 18:48

친일·독재의 유산을 상속받은 한국의 보수세력이, 자신들의 역사적 정당성을 문제삼는 진보진영의 공격에 대응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하나의 ‘역질문’을 던지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당신들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것인가.’ 진보진영은 이런 역공 앞에 머뭇거렸다. 그들의 질문에 ‘아니오’ 혹은 ‘예’라고 답하는 것은, 분단체제에 편승해 반세기 가까이 국가권력을 장악해 온 반공·보수 세력의 과오를 묵인하거나, 진보세력 스스로 ‘국체’를 부정하는 반국가 세력임을 자인하는 것으로 간주될 위험이 컸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대한민국사’를 둘러싼 논쟁이 진보세력 내부에서 점화됐다. 발단은 주대환(54) 전 민주노동당 정책위의장이 뉴라이트 계간지 <시대정신> 겨울호에 기고한 ‘이념으로서의 사회민주주의’라는 글이었다. 주 전 의장은 이 글에서 “사회민주주의자는 대한민국을 긍정한다”고 밝혔고, 이런 ‘선언’은 진보진영 내부에서 거센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언젠가 매듭지어야 할 문제였다”며 그의 ‘커밍 아웃’을 반기는 이도 있었지만, 다수 의견은 “좌파로서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다”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장석준(37) 진보신당 정책실장이 <시민과 세계>에 기고한 ‘진보 좌파에게 대한민국은 무엇인가’라는 글을 통해 주 전 의장의 ‘대한민국 긍정론’을 공개적으로 반박하고 나섰다. 두 사람의 논쟁은 진보정당 내부에서 10년 넘게 이어져 온 ‘개혁사회주의’와 ‘사회민주주의’의 노선 대립을 반영하지만, 한편으로는 1990년대와 2000년대 정당운동을 대표하는 신구 이론가의 대결이란 점에서도 관심을 끈다.

주 전 의장이 대한민국을 긍정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다당제와 삼권분립,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등 민주주의 규칙을 헌법 원리로 채택함으로써 민주화의 제도적 기초를 수립”하는 한편, “효율적인 농지개혁을 통해 이후 경제발전의 역사적 토대를 마련했다”는 것이다. 정부수립기에 대한 우호적 평가는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긍정으로 이어진다. “독일의 비스마르크가 했던 것처럼 부국강병을 추진하면서 자본주의를 발전시키고 복지제도의 기초를 닦았다”는 이유다.

이런 주 전 의장의 평가를 장 실장은 ‘원칙 없는 투항’으로 받아들인다. 주 전 의장이 민주공화국을 바람직한 정체로 간주하면서 대한민국을 긍정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긍정해야 할 대한민국의 정체가 무엇인지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장 실장은 “민주공화국은 핵심은 헌법조항이나 국가기구가 아니라, 투표행위와 개인적 항의, 대중운동으로 나타나는 ‘시민들의 권력행사’에 있다”고 규정한다. 따라서 “민주공화국을 긍정한다는 것은 그 권력의 최종 근거인 ‘대한민국 시민의 힘’을 긍정하는 것이지, 국가기구나 그것을 운영해 온 특정세력의 정당성을 승인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이런 장 실장의 논리는 “진보 좌파가 할 일은 대한민국 60년사에서 자기 정체성을 발견하려는 것이 아니라, ‘아직 오지 않은 민주공화국’에 대한 열망을 통해 현실의 대한민국을 움직여 나가는 것”이란 결론으로 이어진다.

두 사람의 논쟁은 표면적으로는 ‘대한민국의 정당성’에 대한 역사적 승인 문제를 둘러싸고 형성됐지만, 그 기저에 ‘국가’와 ‘민주주의’를 바라보는 관점 차이가 존재하는 까닭에 접점을 찾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이에 대해 신진욱 중앙대 교수는 “논의 구도를 국가와 민주주의에 대한 철학과 관점의 차원으로 추상화시키기보다는, 구체적인 정치 전략과 관련된 생산적 논쟁을 벌여야 한다”고 주문한다. 촛불시위에 태극기를 들고 나오는 시민들의 모습에서 확인되듯 ‘대한민국이라는 정치공동체’에 대한 시민들의 소속 욕망은 엄연한 현실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진보진영은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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