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브 제솝(왼쪽) 영국 랭커스터대 교수와 신광영 중앙대 교수가 21일 서울 중앙대 문과대학에서 세계적 금융위기의 미래와 사회운동의 대응 방향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위기해결 과정속 국가 권위주의 강화 경계해야”
신광영 신자유주의 한국 진퇴양난…사회운동 역할 검토를
제솝 미국도 규제강화…중국중심 지역통합 해법은 한계
미국발 금융위기가 장기적인 세계불황으로 이어질 것이란 우려가 현실화하고 있는 가운데, 지난주 현대 자본주의론과 국가론 분야의 석학인 보브 제솝(62) 영국 랭커스터대 교수가 한국을 찾았다. 제솝 교수는 그람시의 헤게모니론과 프랑스 조절이론을 접목시킨 ‘전략관계적 국가이론’으로 전후 자본주의 경제와 국가의 변화 과정을 추적해온 영미 비판사회과학계의 거목이다. 그는 21일 신광영 중앙대 교수(사회학)와 한 대담에서 “경제위기에 대한 어떤 자본주의적 해법도 권위주의의 심화로 귀결되기 쉽다”며, 이를 견제할 사회운동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대담은 김영미 중앙대 강사의 통역으로 2시간 동안 진행됐다.
신광영=미국에서 시작된 금융위기가 실물위기를 동반한 세계적 경제위기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이번 위기를 레이건 집권 뒤 20년 이상 지속된 신자유주의 경제시스템이 파국을 맞은 것으로 보는 게 타당할까요.
보브 제솝=위기의 발원지와 파급 범위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번 위기는 세계시장의 심장부인 미국에서 발생했고, 전지구적 규모로 확산되고 있다는 점에서 1930년대 대공황과 비슷합니다. 중요한 건 미국이 1997년 금융위기 당시 한국과 동아시아에 강요했던 시장주의적 처방을 자국에는 적용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천문학적 구제금융을 투입해 월가의 죽어가는 금융기관을 살려냈죠. 파산한 신자유주의를 과거 자신들이 비난했던 정실자본주의의 방식으로 구해낸 것입니다.
신=외환위기 당시 국제통화기금(IMF)의 고강도 프로그램을 충실히 따른 결과, 한국은 지구상 어느 나라보다 신자유주의적인 국가로 변모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위기로 진퇴양난에 빠져버렸습니다. 신자유주의 시스템을 유지할 수도, 그렇다고 과거의 개발국가로 돌아갈 수도 없게 된 것이죠.
제솝=한국의 경제난을 외국 자본의 음모나 강압 탓으로 돌리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한국의 관료와 기업인 상당수는 이미 신자유주의의 본산인 미국 시카고대에서 교육받은 사람들입니다. 한국 경제를 신자유주의적으로 재구조화하는 과정에서 핵심 역할을 한 것도 그들입니다.
신=공감합니다. 이 시점에서 눈여겨볼 나라는 중국입니다. 한때 자본주의와 대결했던 사회주의 국가가, 풍부한 외환 보유고에 힘입어 위기의 자본주의 경제를 지탱하는 강력한 버팀목으로 떠올랐으니까요.
제솝=그러나 중국이 지금의 위기를 만들어낸 장본인 가운데 하나라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됩니다. 미국이 누적되는 쌍둥이 적자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건 대규모로 유입된 중국의 잉여자본 덕이었습니다. 중국이 만약 그 돈을 빈곤 퇴치와 사회안전망 확보 같은 내부 문제 해결에 사용했다면, 미국으로 흘러가 부동산 거품을 키우는 데 일조하진 않았을 것이고, 지금의 위기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 점에서 중국과 미국은 부정적 공생관계에 있습니다. 신=그럼에도 중국을 포함해 러시아·인도·브라질 등 신흥시장 국가들이 이번 위기를 해결하는 데 얼마간의 중요한 구실을 하게 될 것이라고 기대하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제솝=동아시아에서 이번 위기에 대한 해결책이 모색된다면, 중국을 헤게모니 국가로 삼아 추진되는 지역통합(블록화)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바람직한 대안인지는 의문입니다. 지금의 신자유주의 질서가 지속되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지역통합은 자본축적의 논리를 한층 강화함으로써 환경 파괴와 사회적 연대의 손상을 불러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지금 상황에서 사회운동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제솝=우려스런 점은 위기 해결 과정에서 국가의 역할이 강조되고 애국주의가 힘을 발휘하면서, 국가의 권위주의적 성향이 강화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사회운동은 이 권위주의 국가에 대항하는 한편, 다양한 사회적 실험을 통해 ‘다른 세계가 가능하다’는 인식을 대중들에게 심어줘야 합니다.
신=선생께선 사회운동의 중요성과 함께 생태적 지속 가능성을 강조합니다. 그렇다면 다양한 사회운동을 생태정치라는 큰 틀로 결속시키는 것이 필수적인데, 문제는 사회운동이 갈수록 이슈별로 분화된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입니다.
제솝=저는 한국의 촛불시위에서 사회운동이 생태정치적으로 재구성될 수 있다는 희망을 발견합니다. 시민들은 광우병 위험 쇠고기의 수입 문제를 통해 나와 가족의 삶에 국한된 것으로 여겼던 건강이란 이슈가 지역·국가의 경계를 넘어 전지구적으로 매개된 생명정치의 문제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촛불시위는 생명정치적 이슈를 통해 일상생활이 얼마든지 급진적으로 재조직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 굉장히 놀라운 사건이었습니다.
신=촛불시위를 두고 어떤 사람은 정당정치의 위기와 종말을 이야기합니다. 반면 촛불시위의 요구가 제도적 변화로 이어지기 위해선 반드시 정당정치의 틀 안으로 수렴돼야 한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제솝=사회운동이 지속성을 갖기 위해선 정당정치와 균형을 유지해야 합니다. 정당은 의회나 국가기구를 통해 정치권력을 행사하는 집단이라는 점에서 사회운동이 갖지 못한 중요한 자원을 갖고 있습니다. 반면 정치권력의 행사에 대한 부담이 없는 사회운동은 한층 급진적인 목소리로 정당을 채찍질하고 견인할 수 있습니다. 두 세력 사이의 소통과 균형이 요청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정리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제솝 미국도 규제강화…중국중심 지역통합 해법은 한계
신광영
제솝=그러나 중국이 지금의 위기를 만들어낸 장본인 가운데 하나라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됩니다. 미국이 누적되는 쌍둥이 적자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건 대규모로 유입된 중국의 잉여자본 덕이었습니다. 중국이 만약 그 돈을 빈곤 퇴치와 사회안전망 확보 같은 내부 문제 해결에 사용했다면, 미국으로 흘러가 부동산 거품을 키우는 데 일조하진 않았을 것이고, 지금의 위기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 점에서 중국과 미국은 부정적 공생관계에 있습니다. 신=그럼에도 중국을 포함해 러시아·인도·브라질 등 신흥시장 국가들이 이번 위기를 해결하는 데 얼마간의 중요한 구실을 하게 될 것이라고 기대하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보브 제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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