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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위기담론 배후엔 ‘정치’가 있다

등록 2008-10-14 21:16

‘한국 위기담론의 사회사’ 학술대회
서울대 장진호 박사, ‘이중성’ 분석
외환위기→외자 큰폭 허용 ‘왜곡’
세계 금융위기→규제완화 ‘역주행’
“모든 위기는 정치적이며 소통 불가능”

촛불시위가 정점에 달했던 지난 6월 수세에 몰린 정부가 정국 전환을 위해 선택한 카드는 ‘경제위기설’이었다. 거시지표가 심상치 않으니 사회적 갈등으로 동력을 소진하지 말자는 ‘경제살리기’ 담론의 변종이었다. 3개월 뒤 이른바 ‘9월 위기설’이 확산되자 이번에는 ‘괴담론’을 꺼내들었다. 근거 없는 악소문으로 투자자와 소비자들을 동요시키지 말라는 엄포였다.

3개월 새 위기설과 괴담론을 널 뛰듯 오간 이명박 정부의 태도는 ‘위기담론’의 정치성을 보여주는 한편, 실체적 위기와 위기담론 사이에 가로놓인 이율배반적 긴장을 드러내주기도 한다. ‘위기이기 때문에 위기를 주장하게 되는가, 아니면 위기를 이야기함으로써 위기가 초래되는 것인가.’

한국사회사학회와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가 ‘한국사회 위기담론의 사회사’라는 주제로 지난 11~12일 개최한 학술대회는 우리 사회 위기담론의 역사적 궤적을 추적함으로써 앞으로의 위기국면에서 담론적 실천을 통한 현실 개입 가능성을 탐색하려는 시도다.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의 장진호 박사가 주목하는 것은 위기담론의 이중성이다. ‘지금은 이러저러해서 위기다’라는 진술은 상황을 단지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위기의 객관적 상황에 개입해” 위기 자체를 구성한다는 얘기다. 이런 관점에서 그는 1997년 이후 위기담론이 사회를 어떻게 재구조화했는지를 분석한다. 그가 보기에 97년 외환위기 국면에서 힘을 발휘한 것은 ‘위기 내인론’이었다. 과잉대출을 해준 외국 채권자에게 ‘도덕적 해이’의 책임을 물을 수 있었지만, 김대중 정부는 위기 원인을 내부 재벌체제에서만 찾았다는 것이다. 여기엔 강력한 지배세력이던 재벌을 견제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는데, 결국 아이엠에프(IMF)나 외국자본에 과도한 정당성이 부여되고, ‘글로벌 스탠더드’의 도입이란 명분 아래 외국자본의 무제한 침투를 허용함으로써 경제의 신자유주의적 전환을 가속화했다는 것이 장 박사의 분석이다.

최근 미국발 금융위기에 대한 이명박 정부의 반응 또한 ‘위기 해석’이 특정한 의도와 결부돼 있음을 증언하는 사례로 간주된다. “규제 강화를 역설하는 유럽·미국과 달리 규제완화를 고수하는 태도”에는 지금의 위기가 ‘시장신화’로 지탱되는 자신들의 정당성에 치명상을 입힐 수 있다는 집권세력의 우려가 숨어 있다는 것이다. 이같은 견해는 위기담론이 위기를 해석·재현하는 주체들의 정치적 의도와 분리될 수 없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위기담론에 정치가 개입하는 사례는 1930년대 대공황 직후 조선 지식인 사이에 벌어진 논쟁에서도 발견된다. 이승렬 연세대 교수가 소개한 잡지 <별건곤> 1930년 11월호에는 ‘조선인 자본’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동아일보> 경제부장 서춘과 사회주의자인 연희전문 교수 홍성하의 논쟁이 담겨 있다. 홍성하가 ‘제국주의론’에 기초해 당시의 위기를 과잉생산·과잉축적에 따른 자본주의의 근본적 위기라는 차원에서 바라보는 반면, 서춘은 근본적 위기론을 부정하며 “일본 정부의 적극적인 토목사업을 통한 대중 구매력의 창출”에 기대를 건다. 이런 대립은 상이한 정치적 선택으로 이어진다. 당시를 ‘혁명적 위기’로 판단한 사회주의자들이 좌·우 합작체인 신간회를 해소하고 독자세력화로 나아갔다면, 자본주의적 발전노선을 조선의 진로로 상정했던 민족주의자들은 국가주의적 경제이념을 내면화하면서 일본 제국주의 지배체제에 편입하는 수순을 밟게 되는 것이다.


“모든 위기는 ‘소통의 위기’와 함께 온다”는 조형근 서울대 규장각 선임연구원의 진술이 주목되는 것도 이 지점이다. 그에 따르면 위기는 그것을 규명하기 위해 동원되는 해석체계의 상이함 때문에 소통의 위기를 불가피하게 초래한다. 결국 모든 위기담론은 ‘위기 구성적’이고 정치적이며 소통 불가능하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반복되는 위기 국면에서 담론적 개입은 어떻게 가능하고, 또 정당화될 수 있는가. 시론적 문제제기를 뛰어넘는 정교한 후속 연구가 기다려지는 이유다.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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