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식민지배와 2차 세계대전에 대한 기술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한·중·일 3국의 갈등은 역사적 사건에 대한 ‘집단 기억’의 차이를 극복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보여준다. 왼쪽부터 아키히토 일왕의 신년인사와 태평양 전쟁에 징집된 조선의 소년병,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로 파손된 회중시계,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불타는 미국 태평양 함대, 2004년 댜오위타이 영유권 갈등과 관련해 일본 국기를 태우는 중국 시위대. AP 연합, <한겨레> 자료사진
동북아역사재단, 미국 스탠퍼드대와 ‘분열된 기억 프로젝트’
만주사변서 평화조약까지 분석…어긋난 ‘집단기억’ 화해 모색
만주사변서 평화조약까지 분석…어긋난 ‘집단기억’ 화해 모색
‘시간적 존재’인 인간이 시간의 근원적 제약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기억’이라는 행위를 통해서다. 지나간 사건과 체험을 상기하고 해석함으로써 인간의 삶의 지평은 과거로, 또 미래로 확장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연유로 기억의 불일치에서 비롯되는 갈등은 양보 없는 인정투쟁의 양상을 띠기 마련이다. ‘무엇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라는 문제는 인간 실존과 결부된 사안이며, 궁극적으로 개인과 집단의 정체성을 구성하고 미래의 실천을 규정짓는 문제인 까닭이다.
민주화 이후 한국사회의 이념갈등 역시 많은 부분이 ‘집단 기억’을 구성하는 문제와 관련된 것이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 각종 과거사 위원회를 두고 빚어진 이념공방, 최근 정부와 정치권, 역사학계가 벌이는 근·현대사 교과서 수정 논란이 그렇다. 일본의 식민지배와 2차 세계대전에 대한 기술을 둘러싸고 한·중·일 3국이 벌이는 ‘역사 전쟁’은 또 어떤가.
동북아역사재단이 29일 미국 스탠퍼드대 쇼렌쉬타인 아·태연구소와 함께 시작한 ‘분열된 기억 프로젝트(Divided Memories Project)’ 는 집단 기억의 화해 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한 학문적 시도다. 3년 동안 진행될 프로젝트를 통해 이들이 지향하는 ‘화해’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일치된 평가를 도출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를 인정하고 조절하는 방법을 탐색하는 것”이다.
이들이 먼저 착수한 작업은 한국과 일본, 중국, 대만, 미국의 역사교과서가 1931년 만주사변에서 1951년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에 이르는 격변의 역사를 어떻게 서술하고 있는지를 비교·분석하는 것이다. 교과서야말로 국가가 공인하는 (반)공식적 역사로, 대중들의 역사적 기억을 구성하는 ‘지배적 서사(master narrative)’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이들의 시도는 역사적 기억에 대한 ‘발생적 비교연구’를 통해 상호이해의 지평을 확장하려는 작업이다.
프로젝트를 총괄하는 신기욱 스탠퍼드대 교수는 “화해는 도달해야 할 종점이 아니라 상호이해를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성취되는 것”이라며 “교과서를 시작으로 내년엔 영화, 2010년엔 각국 엘리트들의 역사인식으로 연구영역을 확장시킬 계획”이라고 밝혔다.
동북아재단의 기획이 역사적 기억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국가간 갈등을 해소하려는 노력이라면, 진실화해위원회가 30일 마련한 해외학자 초청간담회는 ‘과거사’를 두고 국가 내부에서 빚어지는 분열과 대결을 완화할 방법을 모색하는 자리다. 간담회에 초대된 알바레즈 훈코 마드리드대 교수는 2004년 스페인의 과거사 청산법인 ‘역사적 기억법’을 성안했던 인물이다.
훈코 교수가 소개한 역사적 기억법은 스페인 내전과 프랑코 통치기에 빚어진 대량학살과 인권유린에 대해 가해자를 처벌하고 과거에 행사된 사법·행정권의 효력을 무효화하기보다, 피해자에 대한 사과와 명예회복, 경제적 보상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이 때문에 인권단체들로부터 ‘제2의 망각협정’이란 비판도 받지만 “과거사 청산이 이념 전쟁이나 후손 간 갈등으로 확산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는 게 훈코 교수의 설명이다.
역사적 기억과 관련된 국가의 역할에 대해 훈코 교수가 밝힌 견해는 교과서 논란이 한창인 한국 사회에서도 그 의미가 가볍지 않아 보인다. 그의 견해는 이렇다. “국가 내부에서 빚어진 충돌에 대해서는 경합하는 복수의 해석이 존재하기 마련”이며 “민주사회에서 특정 사건에 대해 ‘이것이 진실’이라고 공식화할 권리는 국가도 그 누구에게도 없다”는 것. 과연 ‘기억의 화해’에 이르는 길은 어디일까. ‘국사의 해체’ 말고는 대안이 없는 것일까.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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