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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민주주의 심화인가 반세계화 저항인가

등록 2008-09-03 18:09수정 2008-09-03 19:26

지난여름을 뜨겁게 달궜던 시청광장 촛불문화제에서 한 참석자가 촛불을 환하게 비추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지난여름을 뜨겁게 달궜던 시청광장 촛불문화제에서 한 참석자가 촛불을 환하게 비추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학술 계간지들 ‘촛불과 촛불시민’ 정체성 찾기
<문화과학>, <창작과비평>, <황해문화> 등 학술 계간지들이 일제히 ‘촛불시민’의 정체성을 따져 묻는 특집을 마련했다. “촛불시위를 둘러싼 해석의 정치”(전효관 전남대 교수)가 본격적으로 시작됐음을 웅변하는 일이다. 매체와 논자에 따라 결이 따르다. 크게 보아 “더 심화된 민주주의”(김종엽 한신대 교수)를 강조하는 흐름과 “신자유주의에 대한 저항”(강내희 중앙대 교수)을 눈여겨보려는 흐름으로 나뉜다.

계간 <문화과학>은 가을호에서 특집 좌담과 기획을 마련해 두 흐름을 함께 드러냈다. 우선 촛불시민의 새로움을 다양하게 분석하면서 ‘집단지성’ 또는 ‘다중지성’의 출현을 강조하는 시선이 있다.

촛불은 집단지성의 표현물

“촛불은 집단지성과 집단감성의 표현물이다. 시민 대중을 다중으로 출현시켰다.”(고길섶 <문화과학> 편집위원) “자유로운 교통의 주체가 탄생했다. 개방적 의사교환을 통해 서로 공통성을 지니지만 결코 균일하지 않은 ‘집단적 개인성’을 갖고 있다.”(전규찬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촛불시민은) 자신의 욕망에 거슬리는 것에 맞서 싸우려는 대중이다. 지식인과 대중의 사이가 좁혀지고 대중이 중간적 지식인으로 상승해 대중적 지식인이 됐다.”(원용진 서강대 교수)

이런 분석은 ‘반독재 민주화 세대’로 대표되는 1980년대식 운동권은 물론, 국가와 경제 영역의 거대 담론에 빠져 있는 기성 좌파 진영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포함하고 있다. ‘옛 운동권’과 구분되는 새로운 정치 주체가 탄생했고, 이에 기초하는 새로운 저항의 가능성에 주목하는 견해다. 고병권 ‘수유+너머’ 공동대표는 촛불시민에 대해 “운동조직, 정당, 미디어 등 기존의 ‘매개’를 거부하면서도 어느 운동가보다도 민주주의 직접행동에 대한 훈련이 잘돼 있다”고 평가했다.

지속적 정치세력화는 숙제

노동·계급·권력 등의 개념을 빌려 급진 정치를 도모해온 좌파의 시각에서 보자면 이런 분석에는 ‘과잉’이 있다. 이득재 대구카톨릭대 교수는 <문화과학>에 실린 글에서 ‘다중’이라는 개념이 권력에 대한 급진적 태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설명한 뒤, “촛불을 다중지성, 집단지성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견강부회이며 이번 촛불에서 (진정한 의미의) 정치적 다중은 출현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박영균 <진보평론> 편집위원도 “(촛불시민은) 그 자체로 지속적인 저항의 주체가 될 수는 없다”고 지적했다.

촛불시민의 세대적 특성이나 자유분방한 표현 방식 등에만 주목할 경우, 촛불시민의 무기력을 제대로 볼 수 없다는 문제의식이 이들에게 있다. 특히 촛불시민을 대변할 정치세력의 조직화와 같은 ‘위로부터의 촛불’에 대한 기획을 소홀히 하게 될 것이라는 게 이들의 비판이다. 박영균 <진보평론> 편집위원은 “거대한 국가권력에 대항하여 자신의 삶을 바꿀 수 있는 힘과 가능성을 촛불시민들이 보아야 한다. 따라서 위로부터의 힘의 결집이 필요하다. 그게 없다면 (촛불시민의) 패배와 냉소가 계속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전체적으로 보아 <문화과학>은 반신자유주의 저항을 극대화하는 급진적 정치 기획을 염두에 두고 있다. <창작과비평> 가을호는 이에 대한 비판에 무게를 뒀다. 김종엽 한신대 교수는 이번 촛불이 “공격적 신자유주의에 대한 저항”이었다고 평가하면서도, “그 토대는 민주주의에 있다”고 분석했다. “더이상 민주 대 반민주 구도에 집착하지 말고 신자유주의 대 반신자유주의 구도로 이행해야 한다는 주장은 국민국가의 민주화와 세계 시민사회의 민주화가 갖는 호소력을 간과하고 있다”는 것이다.

소비자본주의 새로운 주체

<황해문화>는 촛불시민의 복합성 분석에 주력했다. 전효관 전남대 교수는 촛불시민이 ‘소비자본주의’ 시대에 탄생한 새로운 주체라고 봤다. 그가 보기에 소비자본주의는 이중적이다. 탈정치화를 거쳐 상품 소비에 몰입하게 한다. 동시에 “주체의 다양한 표현과 감수성을 생산”한다. 이로써 자신의 선택에 따른 권리 의식에 대한 감각이 확장된다. 이들 새로운 주체는 “논리보다 느낌의 공유를 중시”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반신자유주의 주체이건 민주주의 주체이건 기존 지식인들의 이름짓기 자체가 촛불시민에겐 거추장스럽다.

그래도 촛불시민이 누구인지를 묻는 진보 성향 지식인들의 ‘짝사랑’은 당분간 계속될 전망이다.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문화과학>의 글에서 “68혁명의 상상력이 무정부주의적 히피들의 개인화, 폐쇄적인 코뮨, 소수 공동체로 전화했듯이 촛불의 상상력도 형식적 수사에 그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촛불시민이 한국의 ‘히피’에 머물지 않게 하는 ‘정치 기획’은 올 하반기 한국 지성계를 가로지르는 최고의 화두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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