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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주역을 과학적으로 보는 이유는?

등록 2008-07-11 19:22

〈실증주역〉
〈실증주역〉
“주역은 세계 유일·최고의 신탁서”
괘사·효사 정치철학적 함의 좇아
연구·경험 사례 1000쪽에 빼곡히
<실증주역>
황태연 지음/청계·3만8000원

서양 정치철학 전공자인 황태연 동국대 교수가 유학의 4대경전 가운데 하나인 <주역>을 해설한 <실증주역>을 펴냈다. 동아시아 철학사상에 관한 연구서로는 2003년 펴낸 <사상체질과 리더십>에 이은 두 번째 책이다. 지은이는 머리말에서 1994년 처음 <주역> 공부를 시작했지만 내내 헤매기만 하다 2002년 세밑에 원주의 젊은 역학자의 도움으로 역학의 세계로 들어가는 길을 찾았다고 말한다. 1000쪽에 이르는 두툼한 분량의 이 연구서는 그런 경로로 알게 된 <주역>의 정치철학적 함의를 학술적 연구와 실증적 경험을 통합해 서술하고 있다.

지은이는 자신의 <주역> 연구 방법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한다. 첫째가 ‘고증’이다. 고대 한자에 대한 고고학적·문헌학적 풀이와 <주역>의 배경이 되는 사건에 대한 역사적 고증을 결합해 “최대한 과학적으로 괘사와 효사의 원의를 파악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둘째가 ‘논증’이다. 동서양의 <주역> 대가들의 견해를 참조함으로써 괘사와 효사에 대한 더 나은 해석을 논증적으로 도출했다는 것이다. 셋째가 ‘실증’이다. 과거 역학자들의 서점(筮占) 사례뿐만 아니라 지은이 자신이 직접 겪은 일에서 얻은 사례를 통해 괘·효사의 모호한 의미를 최종적으로 확정하는 것을 말한다.

지은이는 <주역>의 문헌적 가치를 한마디로 이렇게 요약한다. “<주역>은 문자로 전해진 세계 유일, 세계 최고의 신탁서다.”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 사람들이 국가 중대사를 결정할 때 신탁에 의지했듯이, 고대 중국인들은 점을 통해 ‘천명’을 받았던 것이다. 다행히도 고대 중국인들의 신탁 결과는 문자로 정리돼 후대에 전승됐다. 그런 까닭에 “<주역>은 4000년 전 동양의 태고대에 창안되어 오늘날까지 거의 원형 그대로 전래된 ‘초월적 지식과 영험한 지혜’의 운영체계다.” 요컨대, <주역>이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미래를 예지하게 해주는 비의적 말씀인 것인데, 이것을 단순히 비과학으로 치부할 수만은 없다고 지은이는 강조한다. 그는 칸트의 순수이성이 대표하는 합리적 지식으로는 영적·직관적 인식의 세계를 파악할 수 없으며, 그런 세계는 사람의 지혜를 뛰어넘는 초월적 지혜를 요구한다고 말한다.

〈주역전의 대전〉. 정이천의 〈이천역전〉과 주희의 〈주역본의〉를 합본해 명나라 호광(胡廣)이 편찬한 책.  우리나라에서 가장 널리 사용된 주역 주석서이며 <실증주역>에서도 인용하고 있다.
〈주역전의 대전〉. 정이천의 〈이천역전〉과 주희의 〈주역본의〉를 합본해 명나라 호광(胡廣)이 편찬한 책. 우리나라에서 가장 널리 사용된 주역 주석서이며 <실증주역>에서도 인용하고 있다.
이런 전제 위에서 이 책은 <주역>의 첫 괘인 ‘건괘’에서부터 마지막 괘인 ‘미제괘’까지 차례로 따라가며 64개의 괘사와 386개의 효사를 해설한다. 특기할 것은 지은이가 앨프리드 후앙 등의 견해를 빌려 괘사와 효사의 그 모호하고 비의적인 이야기들이 주나라 창업기를 비롯해 은-주 왕조의 역사적 사실을 품고 있다고 본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건괘’ 첫 효인 ‘잠룡 물용’(潛龍 勿用)은 주나라 창업자 가운데 한 사람인 ‘문왕’의 고사를 말하는 것으로 푼다. “이것은 정확히 은나라의 폭군 주왕이 문왕을 7년 동안 ‘유리의 옥’에 가두어 두었던 상황이다. 문왕의 대단한 인내심과 자제력으로 옥살이를 견뎌냈다.” 이런 이해에 따라 지은이는 ‘잠룡 물용’의 뜻도 ‘물에 잠긴 용이니 쓰지 말라’라는 통상의 의미로 풀지 않고 ‘잠룡은 나서지 말라’로 풀이한다. ‘어둠 속에서 양생하며 때를 기다리라’는 뜻으로 보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건괘의 다섯 번째 효사인 ‘비룡 재천’(飛龍在天)은 문왕의 뒤를 이은 무왕이 은의 폭군을 타도하고 천자에 오른 고사에 대한 은유로 풀이한다.

이 책에는 지은이가 현실 정치에 깊숙히 개입해 겪은 갖가지 크고 작은 경험들이 괘·효사들의 뜻을 푸는 데 실례로 제시되고 있다. ‘곤괘’의 5효인 ‘황상 원길’(黃裳元吉, 노란 치마로다, 아주 선하게 길하리라)을 해석하면서 이런 일화를 이야기한다. “여섯 명의 대통령을 모신 고건 전 총리가 여섯 명의 임금을 받든 황희의 이미지를 활용하는 것이 어떤지를 물은 서례(2006년 5월20일)에서 이 ‘황상 원길’을 얻었다. 필자는 ‘황상’과 ‘황희’의 ‘황’자가 일치하고 또 황희가 세종 때의 ‘황상’ 같은 현신이므로 ‘황희의 이미지를 활용하면 이기고(원길), 그러지 않으면 크게 불리하다’고 점단했다. 그러나 고건 전 총리는 황희 이미지 활용을 거부했다. 결과는 지속적인 지지도 하락으로 나타났고 6개월 뒤 대선 불출마를 선언하고 말았다.” 이런 서례는 <주역>의 뜻을 좀더 실감 나게 느끼는 데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진지한 학문과 정치 컨설팅의 경계가 흐릿하다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이 책에는 공자가 인생운을 점쳐보았다는 <공자가어>의 이야기가 인용돼 있다. “공자는 일찍이 스스로 주역 괘를 뽑아 ‘비(賁)괘’를 얻자 안색이 변해 평안치 않은 모습을 보였다.” 왜 그랬을까. ‘비괘’는 “내심 계획은 화려하고 광대하나 공적 세계에서는 실현하지 못하는” 괘다. “따라서 정치세계에 출사하기를 간절히 바랐던 공자는 비괘를 얻고 수심에 잠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비괘는 그 본질적 속성상 길한 괘다. 공자는 정치세계에서는 인정받지 못했지만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과 같은 개인적인 일에서는 전무후무한 성공을 거두었던 것이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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