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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탁오 평전<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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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탁오 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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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1527~1602). 호는 탁오. 명나라 인물. 26살에 향시에 올라 28년 동안 관직생활. 76살에 옥중 자결하기까지 22년동안 ‘잘못된 도로 사람들을 현혹시킨 자’다.
예순 두살이던 어느 날, 그는 머리가 가려워 긁자니 번거롭고 땀 냄새에 비듬까지 날리자 머리를 깎는다. “4품관 전직관료가 출가했다”는 스캔들은 당연지사. 유교가 전횡하는 사회에 대한 항의와 도전이었다. 걸어다니는 고깃덩이, 또는 위선자 가운데 택일하게 만드는 사회에서 개인의 자유와 권리, 또는 행복에 무게를 두는 것은 ‘대역무도’였다. ‘오십 이전의 나는 개였다’는 그의 고백은 자신과 유교사회를 향한 똥침이었다.
그는 쉰넷에 관직을 버리면서 관료사회의 참을 수 없는 속박을 풀었고, 예순 둘에 아예 머리를 밀어버림으로써 종법사회와 결별했다. 양명학과 불학을 넘나든 그는 이단아다.
그는 입만 열면 공맹왈 하는 부류를 천시하였으며 자연지성에 충실할 것을 주장했다. ‘여색이 나라를 망친다’ ‘여성은 식견이 짧다’는 견해를 반박하고, 군주한테 간언하다 죽는 것의 무의미함을 말하며, 200%의 담력과 식견이 요구된다며 ‘간웅’를 옹호했으며, 가짜도학을 비판하는가 하면 당시 장거정 승상의 죽음을 전후한 관료사회의 표변을 질타했다. 경정향과 10여 년에 걸친 편지가 논쟁의 축이다. 그것들이 묶여 <분서> <장서> <설서> 등의 저작을 이룬다.
그의 책은 상당히 널리 전파된다. 당시 인쇄술 사정을 감안할 때 저술의 논란성의 방증이다. 그가 무작위로 던진 돌에 맞은 수많은 사람들은 그를 감옥에 집어넣는다. 젊은 비구니 매담연과의 염문(?)도 한몫했다. 그의 머리를 깎았던 면도칼이 스스로 목을 베는 도구였다.
“옷 입고 밥 먹는 것이 인륜이요, 만물의 이치다.”
“동심은 거짓없고 순수하나 사회의 견문과 무언의 암시가 주입되면서 그 순수성을 잃게 된다.”
“타고난 나쁜 사람은 없다. 성현이 되느냐 강도가 되느냐는 기회를 만나느냐 못 만나느냐의 차이다.”
그의 혁명적인 인식은 볼테르, 몽테스키외 등 계몽사상과 비교된다. 그의 성정은? 닳아지는 빗자루를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깔끔을 떨었다. 옷은 잡티 하나 없었고, 자주 얼굴을 닦고 몸을 털었다. 사람들의 콧김 냄새가 싫어 멀리 앉게 하고 내쫓기도 했으며, 말이 통하지 않는다 싶으면 말 한마디 없이 조용히도 있었다. 조선에서는 그가 나던 해 최세진의 ‘훈몽자회’가 나왔고, 그의 늙마 파란때 임진왜란를 겪었다. 그는 1599~1600년 세 차례에 걸쳐 마테오 리치를 만나는데 3년 뒤 조선의 이광정과 권희가 마테오 리치의 ‘곤여만국전도’를 들여오게 된다. <이탁오 평전>(옌리에산·주지엔구오 함께지음, 돌베개 펴냄)을 옮긴 홍승직 교수는 이탁오의 <분서>도 옮긴 바 있다. 임종업 기자 blitz@hani.co.kr
그의 혁명적인 인식은 볼테르, 몽테스키외 등 계몽사상과 비교된다. 그의 성정은? 닳아지는 빗자루를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깔끔을 떨었다. 옷은 잡티 하나 없었고, 자주 얼굴을 닦고 몸을 털었다. 사람들의 콧김 냄새가 싫어 멀리 앉게 하고 내쫓기도 했으며, 말이 통하지 않는다 싶으면 말 한마디 없이 조용히도 있었다. 조선에서는 그가 나던 해 최세진의 ‘훈몽자회’가 나왔고, 그의 늙마 파란때 임진왜란를 겪었다. 그는 1599~1600년 세 차례에 걸쳐 마테오 리치를 만나는데 3년 뒤 조선의 이광정과 권희가 마테오 리치의 ‘곤여만국전도’를 들여오게 된다. <이탁오 평전>(옌리에산·주지엔구오 함께지음, 돌베개 펴냄)을 옮긴 홍승직 교수는 이탁오의 <분서>도 옮긴 바 있다. 임종업 기자 blitz@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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