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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초국적 자본 견제할 힘 저항적 ‘민족의식’에 있다

등록 2007-11-09 20:48

초국적 자본 견제할 힘 저항적 ‘민족의식’에 있다
초국적 자본 견제할 힘 저항적 ‘민족의식’에 있다
진보적 민족주의 유효한가
우리시대 지식논쟁 /

1. 유효하다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의 원어인 영어 단어는 내셔널리즘(nationlism) 하나이다. 근대 민족국가가 형성되면서 이른바 민족 혹은 국가 관념이 태동되었다는 게 일반적 통념이다. 우리도 조선시대만 해도 ‘소중화’ 의식이 뚜렷했을 뿐이다. 중국인들보다 더 지극정성으로 주자학을 섬긴 것이 이를 잘 보여준다.

하지만 근대 이후 민족주의는 우리 사회에 가장 강력한 영향을 끼친 이념이었다. 일제하 독립운동이나 분단 이후 통일운동까지 이 모든 투쟁의 배후에는 ‘민족’이 있었다. 친일파와 반공 지배세력도 민족이라는 외피로 국가주의적 성향을 가렸다.

독재에 맞선 저항적 민족주의의 주요 명분은 분단모순 극복을 위한 통일운동이었다. 민주정부가 들어선 현재 상황은 많이 변했다. 국가와 기업가의 통일에 대한 열정이 기층 민중의 그것보다 더 못하다고 하기 어렵게 되었다. 급증하는 다문화 가족도 민족 관념의 정당성에 대해 되묻게 한다. 탈민족 담론이 거세지는 배경이다. 탈민족론자들은 민족이 함의하는 배타성은 민주적 개방성과 어울리지 않는다거나, 사회의 다른 갈등이 정당하게 자리잡지 못하도록 한다는 비판을 제기하고 있다.

진보적 민족주의의 유효성을 지지하는 안병욱 교수는 이 글에서 공동체적 유대관계가 조직적이고 지속적인 저항운동을 이끈 원동력이었다면서, 세계화 시대 민족주의적 가치관만이 무소불위 초국적 자본의 폭력을 견제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박노자 오슬로대 교수와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가 각각 비판적 시각과 제3의 시각을 밝힐 계획이다. 강성만 기자 sungman@hani.co.kr


민족주의라는 용어는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그 의미가 다르고 그 쓰임새도 다양하다. 따라서 민족주의 논쟁은 매번 접점을 찾지 못하고 어긋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민족이라는 말을 한국 사회처럼 친숙하게 사용하는 경우도 흔하지 않을 것이다. 또 한국 사회를 논할 때 민족문제는 빠지지 않는다. 현실을 논하건, 역사를 설명하건 민족 내지 민족주의 문제는 중요하게 거론된다. 역사적으로 어느 때건 주어진 나름의 과제가 있었다. 이 과제들은 한반도에서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이면 누구나 외면하기 어려운 공통적인 사항이었기 때문에 민족공동체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대처해 왔다. 곧 민족주의적인 인식인 것이다.


한국인의 민족적 정체성 가운데 가장 특징적인 요인은 오랜 기간 역사공동체를 공유해 왔다는 점이다. 한국사회는 천여 년 이상 하나의 국가로 운영되면서 불교·유교·기독교 등 다양한 문화를 공통적으로 향유해 왔다. 그 과정에서 원초적 공동체 의식을 공유해 온 점을 부인할 수 없다. 따라서 유럽 근대사를 배경으로 형성된 민족주의 개념을 원론적으로 적용하여 한국 사회에서의 민족주의 문제를 비판하려는 것은 처음부터 한계를 지닌 것이다.

한국 사회는 20세기 들어 식민주의의 지배를 겪으면서 민중의 자율적인 의지는 탄압받고 식민주의에 편승한 소수만이 민족과 분리된 채로 특권을 향유하였다. 이를 두고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은 일제 치하에서 성장의 과실이 조선인에게도 돌아갔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또 “많은 경우 종군 위안부들을 고통과 희생으로 내몬 원초적 요인들은 가정 내 가부장적 권력의 구타와 학대였다. 위안부의 비극은 민족이라는 잣대만으로는 해석할 수 없는 복잡한 성적, 사회적 차별을 내포하고 있었던 것”(박지향 서울대 교수·서양사)이라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식민지배의 후과는 극복되지 않았으며 외세는 기득권층을 숙주로 하여 여전히 중요한 변수로 한국사회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해방 이후 남북분단에 이어 남한 사회는 반공주의에 의해 철저히 통제되었다. 반공주의는 이념에 의한 분열과 갈등을 조장함으로써 공동체적인 유대관계를 파괴하고 민주적 발전을 차단하였다. 남북 분단은 외부 요인이 크게 작용했지만 안으로 지배층과 민중 사이의 민족주의적 인식차와 무관하지 않았다. 남북이 각기 외세를 내세워 분단을 초래하였고 급기야 전쟁으로까지 비화된 분열과 갈등을 초래한 것은 여전히 민족주의적 이념을 바탕으로 민족적 통합을 이루지 못한 데 원인이 있다고 하겠다. 이 과정에서 민족주의는 한국 사회의 진보와 개혁의 대명사처럼 인식되었으며 불온한 사상으로 탄압을 받았다. 또 반공주의 아래서 한반도는 일종의 게토가 되어 그 안에서 외부와 철저히 단절되었다. 지난 20세기 후반 내내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민주화운동은 이러한 게토를 파괴하고 밖으로 세계사와 소통하기 위한 투쟁이었다. 1960년 4월항쟁을 비롯해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그리고 1987년 6월항쟁으로 이어진 민주화 운동은 민중을 중심으로 형성된 공동체적 유대 관계와 민족주의 이념에 기반하였다.

‘민족공동체의식’ 역사적 공유한 한국
서구 ‘민족주의’ 곧장 적용해선 안돼
식민·분단·독재에 맞선 ‘저항적 담론’

20세기 한국 사회가 겪어야 했던 분단과 전쟁, 독재 등 파괴적 혼란은 그 가장 큰 원인이 외세와의 관련 속에 있었다. 오늘날 통일문제와 함께 민주화·산업화 과정을 거치면서 야기된 내적 갈등 문제들을 안고 있고 또 밖으로 세계화 조류에 조응하면서 정체성을 유지하는 과제가 중첩되어 있다. 이런 역사를 성찰적으로 검토한 과정에서 민족주의는 자연히 가장 친화적이 되었다. 이러한 조건에서 민족주의가 여전히 한국사회의 지배적 담론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10여 년 전부터 민족주의 담론에 비판적 문제 제기가 행해지고 있다. 일부에서는 이른바 탈민족을 내세우고 혹은 ‘민족주의는 반역’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들 주장에 분명 유용하고 긍정적인 내용이 많다. 그동안 민족주의 담론에 다소 관념적이고 맹목적인 표현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탈민족주의를 위해 지적되고 있는 것들은 논쟁을 위해 억지로 제기된 측면이 강하다. 일부에서는 지배권력을 추수하면서 전개한 국수적이거나 파시즘적 사례를 끌어다 한국 민족주의의 역사성에 붙여 함께 매도하고 있다. 곧 “민족주의 패러다임은 한국의 지적 삶을 너무나 깊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여타의 가능한 역사 해석 방식을 모두 어지럽히고 포섭하며 또는 실제로 말살시켰다”(카터 에커트 하버드대 교수)라고 단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탈민족·탈근대 주장에는 구체적인 대안을 찾을 수가 없고 오히려 한국 사회운동의 구심점을 해체함으로써 허무와 공허함을 조장하려는 듯이 보인다. 민족주의는 현대 한국사회를 인식하기 위한 그리고 역사에 참여하기 위한 의식화의 매개체인 것이다.

오늘날 신자유주의가 시장만능을 내세우며 민중의 희생을 강요하고 있다. 신자유주의하의 초국적 자본은 세계화 추세 속에서 지구촌 곳곳으로 무소불위의 팽창과 전일적 지배를 관철하고 있다. 국제 경쟁력이라는 명분아래 자본과 기득권층의 이익만을 고려하고 있다. 한국 노동인구의 절반 이상이 비정규직으로 차별을 강요당하고 있으며 자유무역협정을 통해 자본은 국경을 거침없이 넘나들지만 농민·노동자들은 떠돌이로 하루하루 생존을 위한 절박한 처지에 내몰리고 있는 것이다. 예전 같은 국가와 국경의 장벽은 이제 더는 장애가 되지 않아 보인다.

신자유주의 대안은 민중 주체적 행동
노동 계급 성장 미흡한 현실에서
민족적 유대 ·가치관은 유효한 ‘무기’

하지만 한국사회의 오랜 공동체적 유대관계와 민족의식, 관습, 언어 등이 초국적 자본의 자유로운 행보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그것들은 대부분 민족주의라는 이름에 포괄되고 있는 것들이다. 이와 더불어 한국의 강한 공동체적 유대가 오랜 동안의 민주화 운동 경험과 결합됨으로써 조직적이고 지속적인 저항운동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동안 칸쿤·시애틀·홍콩 등의 반세계화 시위의 중심에 한국 민중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은 이런 맥락과 닿아 있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자본 중심의 사회이고 이를 위해서는 민중의 주체적인 행동과 능동적 변화를 원하지 않는다. 탈민족주의는 불균등한 세계체제에 대한 대응논리와는 거리가 있으며 지배권력에 의한 통제와 순응을 지지한다. 자본에 의해 모든 인간이 줄을 서야 할 때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방책은 인간의 자율적 의지에 기반한 유대에서 찾아야 한다. 흔히 계급의식과 성정체성, 젠더문제를 거론 하지만 현재 한국사회는 계급·젠더 문제 이전에 국가 간의 이해 대립이 초래한 모순에 의해 더 좌우되고 있다. 이에 따라 한국사회의 가장 유용한 유대관계는 민족의식이며 이런 맥락을 설명해 주는 것이 민족주의이다.

진보는 상대적으로 약자 계급의 집합으로 추동된다. 이러한 진보운동을 담지할 노동계급의 성장이 한국 사회에서는 만족스럽게 진행되지 못했다. 한국에서 노동 부분의 지체는 분단과 전쟁에 따른 반공주의적 억압에 기인한다. 역설적이게도 노동계급이 제 위상을 찾을 수 있을 때까지는 여전히 민족이 중심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


안병욱 국사학과 교수
안병욱 국사학과 교수
그럼에도 일부에서는 줄곧 지배층의 인식을 대변하기 위해서 민족논리에 시비를 걸었다. 민중과 진보세력에게 혼란과 갈등을 야기한다고 탓하면서 진보적인 논의를 억제하였다. 무소불위 초국적 자본의 폭력을 견제할 수 있는 수단이 현재 민족주의적 가치관이 아니고서 다른 방법이 있을 수 있겠는가. 사실상 민족주의는 반역이라는 주장은 민족주의에 대한 대안 없는 반역에 지나지 않는다. 안병욱 가톨릭대 교수


안병욱 가톨릭대 국사학과 교수는 1948년생으로 조선후기 사회변동 문제와 민중운동·민주화운동에 관한 연구에 힘을 쏟고 있습니다. 그동안 과거청산과 학술 운동에도 참여하였으며 최근 국정원 진실위 보고서를 엮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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