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비극
3대 비극작가 21편 작품에 담긴 ‘인간의 모순’ 깊이있게 조명
인간은 자유의지 펼수록 운명에 휘말려 끝없이 고통받는 존재
인간은 자유의지 펼수록 운명에 휘말려 끝없이 고통받는 존재
〈그리스 비극 - 인간과 역사에 바치는 애도의 노래〉
임철규 지음/한길사·3만2000원 그리스 비극은 인류사에 최초로 등장한 희곡 문학 형식이다. 이 비극은 그때 다만 등장한 것이 아니라 등장과 거의 동시에 정점에 이르렀다. 싹이 트자마자 가장 화려한 꽃을 피운 그리스 비극은 서양 문화의 원천이자 원형이 되었다. 그 원형은 너무나 압도적인 원형이어서 뒤를 이은 모든 비극 작품을 무색하게 했다. 비극이 문학의 최고 형식이라면, 그리스 비극은 이 최고 형식의 꼭대기에 선 최고의 문학이다. 문학을 탐구하는 사람이라면 이 거대한 기념비적 창조물에 도전해보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을 것이다. 영문학자 임철규 연세대 명예교수가 이 도전을 감행했다.<그리스 비극-인간과 역사에 바치는 애도의 노래>가 이 도전의 결과물이다. 아무나 에베레스트를 등정할 수는 없는 법이다. 지은이가 그리스 비극에 도전할 수 있었던 것은 충분한 준비와 경험이 뒷받침돼 있었기 때문이다. 40년여 전 학창시절에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배우고 미국에서 유학할 때 그리스·로마의 고전 문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은 것이 준비에 해당한다면, 정년을 앞두고 5년여 동안 대학원생들을 상대로 하여 그리스 비극을 강의한 것은 경험의 축적이라 할 것이다. 이 책에서 그 준비와 경험이 얼마나 탄탄한 것인지 확인할 수 있다. 그리스 비극에 관한 수많은 주석서·이론서를 참고할뿐더러 서양 사상사의 굵직한 성과들을 수시로 동원한다. 넓게 보지 못하면 깊게 볼 수 없다. 깊이는 넓이를 전제로 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의 방대한 주석은 통찰의 깊이를 가늠케 해주는 지표 노릇을 한다. 지은이는 “그리스 비극 전체를 조명하는 깊이 있는 책을 쓰는 데 충실하고자 했다”고 밝히고 있는데, 자부 섞인 고백 그대로 이 책은 작품 포괄의 범위에서도 그 넓이를 자랑한다. 3대 비극작가 아이스퀼로스·소포클레스·에우리피데스의 거의 모든 주요 작품을 논의의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아이스퀼로스의 경우엔 현존하는 작품 7편을 모두 분석했고, 소포클레스는 8편 중 7편, 에우리피데스는 19편 중 7편을 꼼꼼히 살폈다. 지은이는 말한다. “이 정도면 그리스 비극 전체를 광범위하게 다룬 책으로서 별로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
그리스 비극이 꽃핀 기원 전 5세기는 아테나이(아테네) 민주주의가 영광을 누리던 시절이었다. 비극 공연은 이 민주주의 공동체(폴리스)가 벌이는 축제의 대미를 장식했다. 아테나이 시민은 물론이고 그리스 전역에서 초청된 사람들이 한꺼번에 비극을 관람했다. 그리스 비극은 말하자면, 아테나이 번영의 상징이었고 시민적 결속의 중심이었다. 그러나 이 시대는 단지 번영만 구가하던 시대가 아니라, ‘혼란이 잠재한 전환’의 시대이기도 했다. 갈등과 균열과 모순을 안고 있는 시대였던 것이다. 호메로스의 서사시가 보여주는 신화적인 ‘황금시대’에 비하면 이 시대는 확실히 불완전한 시대였다. 지은이는 비극이 탄생한 시대의 이런 성격에 주목한다. “갈등에 찢긴 현실을 보여줌으로써 그것을 문제시하는” 것이 그리스 비극이라는 것이다.
지은이는 그리스 비극이 당대의 시민들에게 여러 가지 방식으로 해석되고 수용됐음을 상기시킨다. 정치적 수용이 그 가운데 하나다. 그리스 시민들에게 비극은 일종의 이데올로기적 텍스트였다. 이를테면, 아이스퀼로스의 <페르시아인들>에서 비극의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작품은 그리스를 침공한 페르시아의 군주 크세르크세스의 오만과 파멸을 다루고 있다. 아이스퀼로스는 크세르크세스가 일으킨 전쟁을 ‘예속 대 자유’의 대결로 설정한다. “아이스퀼로스에게 그리스가 페르시아에 대항해 거둔 승리는 노예사회에 대한 민주사회의 승리다.” 그리하여 페르시아 전쟁은 “페르시아적 가치에 대한 그리스적 가치의 승리, 더 나아가 동양문명에 대한 서양문명의 승리”로 받아들여졌다. 지은이는 에드워드 사이드의 견해를 소개하면서, ‘오리엔탈리즘의 기원’이 이 작품에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리스 비극이 이런 정치적 텍스트에 머물렀다면 인류 보편의 고전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지은이가 힘주어 분석하는 것은 그리스 비극의 ‘형이상학적 비극성’이다. 인간 존재의 근원적 모순을 그리스 비극작품들이 탁월하게 형상화했다는 것이다. 인간 존재의 모순은 신과 인간의 대결 또는 운명과 자유의 대결로 나타난다. <페르시아인들>의 주인공 크세르크세스도, <테바이를 공격하는 7인의 전사>의 주인공 에테오클레스도 이 대결이 낳은 비극적 결말을 보여준다. 이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자유의지의 담지자’들이다. “자기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 결정 내리고 행동하는 ‘독립적인’ 인간”이 이들이 보여주는 모습이다. 그러나 그 자유는 언제나 신들 혹은 신적인 힘이 설정한 운명에 갇힌 자유다. 주인공들은 자신들의 의지를 실현하려 발버둥치지만, 그럴수록 운명의 수렁에 휘말려든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왕>은 그 자유와 운명의 모순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자식에게 죽임당하고 아내를 빼앗길 것이라는 신탁을 받은 왕은 그 신탁을 피하려고 자식을 버리지만, 그렇게 버림받아 자란 자식은 아버지를 아버지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다. 등장 인물들에게 자유의 행위였던 것이 운명의 수행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리스 비극의 이 모순에서 근대 철학자 게오르크 헤겔의 ‘자유와 필연의 변증법’이 나왔음이 분명하다. 개인은 자유로운 행위를 통해 운명적 법칙을 실어나르는 것이다. 지은이는 여기서 인간 존재의 보편적 조건을 찾아낸다. 인간의 불완전한 지혜는 운명에 부딪쳐 깨질 수박에 없다. 거기서 존재의 비극성이 솟아난다. 그리스 비극은 이 비극성을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모든 사람들을 위로하고 어루만지는 ‘애도의 노래’다. “인간이 신이 되지 않는 한, 인간에게 고통과 절망은 그치지 않는다. 이것이 인간의 조건이다.” 고명섭 기자michael@hani.co.kr
리얼리즘·유토피아를 위해 인류의 비극 보듬다 지은이와 함께 - 임철규의 책으로 본 지적 여정
임철규 연세대 명예교수는 과작의 저술가다. 그가 지금껏 쓴 책은 이번에 펴낸 <그리스 비극>을 포함해 네 권에 지나지 않는다. 그림으로 치면 그의 저작은 오래 공들여 그린 대작이다. 책의 갈피마다 농도 짙은 사유가 깊게 배어 있다.
그의 저작 출간은 대략 10년 터울이다. 첫 번째 책 <우리 시대의 리얼리즘>(한길사 펴냄)이 나온 것이 1983년이었다. 이 시기 그의 고민이 집중된 것이 ‘리얼리즘’이다. 리얼리즘은 문학 방법론을 지칭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더 크게는 현실을 바라보는 자세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1970년대 후반 유신독재가 맹위를 떨치던 시절 그리고 5공화국 정권이 민주주의를 유린하던 시절에 그는 리얼리즘의 정신으로 문학을 이해하고 현실을 설명하고자 했다. “현실의 모순을 극복하여 이 현실에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고자 하는 것이 리얼리즘의 기본정신이다.”
이 책에 이어 1994년에 출간한 것이 <왜 유토피아인가>(민음사 펴냄)다. 리얼리즘의 정신을 근저에서 받쳐주던 사회주의 이념이 이 책의 글들 쓰던 시기에 퇴출당했다. 지은이는 역사적 전망이 흐려진 그 시기에 ‘유토피아’를 들고 나왔다. 아무리 미래가 암담하더라도 그 미래를 향한 ‘희망의 원리’를 내던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유토피아의 정신은 손에 잡히지 않는 공허한 것일지 몰라도 그것 없이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막스 베버가 갈파했듯이 만약 인간이 불가능한 것을 향해 몇 번이나마 손을 뻗지 않았더라면, 가능한 것을 얻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유토피아의 포기와 더불어 인간은 역사를 형성하려는 그의 의지를 잃고, 이와 함께 역사를 이해하려는 그의 능력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다시 10년 뒤 그는 <눈의 역사, 눈의 미학>(한길사 펴냄)으로 인류 역사를 총체적으로 조망하는 간단치 않은 작업을 했다. 이 책에서 그는 인류의 역사가 ‘비극의 역사’임을 확인한다. 그가 말하는 인간의 ‘눈’은 추적하고 발견하고 인식하고 지배하려는 인간 욕망의 표상이다. 그 욕망 때문에 우리의 삶은 비극적일 수밖에 없지만, 그 욕망을 눈의 기능인 ‘눈물’로써, 다시 말해 타자의 고통을 슬퍼함으로써 제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번에 펴낸 <그리스 비극>에서 인간 삶의 비극성을 총체적으로 극화한 그리스 비극 작품으로 들어가 그 비극성을 다시 한번 철저하게 검토한다. 그가 삶을 비극으로 인식하는 데는 그 자신의 삶의 터전이었던 이 땅 역사의 비극성이 배경으로 놓여 있다. “이 땅의 고난에 찬 분단의 역사, 수난의 역사, 억압의 역사를 숙명적으로 껴안아야”(<눈의 역사, 눈의 미학>) 했던 그는 이 책에서 그 숙명 때문에 인간 삶의 비극성을 서구의 다른 학자들보다 좀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리얼리즘의 정신에서 출발해 유토피아의 꿈을 통과해온 그의 지적 여정은 그가 말하는 비극성이 체념과 순응이 아니라, 위로와 공감을 통한 공동체 가치의 확인에 대한 열망임을 보여준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임철규 지음/한길사·3만2000원 그리스 비극은 인류사에 최초로 등장한 희곡 문학 형식이다. 이 비극은 그때 다만 등장한 것이 아니라 등장과 거의 동시에 정점에 이르렀다. 싹이 트자마자 가장 화려한 꽃을 피운 그리스 비극은 서양 문화의 원천이자 원형이 되었다. 그 원형은 너무나 압도적인 원형이어서 뒤를 이은 모든 비극 작품을 무색하게 했다. 비극이 문학의 최고 형식이라면, 그리스 비극은 이 최고 형식의 꼭대기에 선 최고의 문학이다. 문학을 탐구하는 사람이라면 이 거대한 기념비적 창조물에 도전해보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을 것이다. 영문학자 임철규 연세대 명예교수가 이 도전을 감행했다.<그리스 비극-인간과 역사에 바치는 애도의 노래>가 이 도전의 결과물이다. 아무나 에베레스트를 등정할 수는 없는 법이다. 지은이가 그리스 비극에 도전할 수 있었던 것은 충분한 준비와 경험이 뒷받침돼 있었기 때문이다. 40년여 전 학창시절에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배우고 미국에서 유학할 때 그리스·로마의 고전 문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은 것이 준비에 해당한다면, 정년을 앞두고 5년여 동안 대학원생들을 상대로 하여 그리스 비극을 강의한 것은 경험의 축적이라 할 것이다. 이 책에서 그 준비와 경험이 얼마나 탄탄한 것인지 확인할 수 있다. 그리스 비극에 관한 수많은 주석서·이론서를 참고할뿐더러 서양 사상사의 굵직한 성과들을 수시로 동원한다. 넓게 보지 못하면 깊게 볼 수 없다. 깊이는 넓이를 전제로 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의 방대한 주석은 통찰의 깊이를 가늠케 해주는 지표 노릇을 한다. 지은이는 “그리스 비극 전체를 조명하는 깊이 있는 책을 쓰는 데 충실하고자 했다”고 밝히고 있는데, 자부 섞인 고백 그대로 이 책은 작품 포괄의 범위에서도 그 넓이를 자랑한다. 3대 비극작가 아이스퀼로스·소포클레스·에우리피데스의 거의 모든 주요 작품을 논의의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아이스퀼로스의 경우엔 현존하는 작품 7편을 모두 분석했고, 소포클레스는 8편 중 7편, 에우리피데스는 19편 중 7편을 꼼꼼히 살폈다. 지은이는 말한다. “이 정도면 그리스 비극 전체를 광범위하게 다룬 책으로서 별로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
소포클레스의 <클로노스의 오이디푸스> 등장인물 안티고네와 오이디푸스가 고향테바이에서 추방당해 클로노스에 들어서는 장면. 샤를 프랑소수이 자라베르 그림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안드로마케>의 주인공 안드로마케(오른쪽). 자크루이 다비드 그림<안드로마케의 비극>(1783)
리얼리즘·유토피아를 위해 인류의 비극 보듬다 지은이와 함께 - 임철규의 책으로 본 지적 여정
임철규 연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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