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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일본소설 안목 키워줄 ‘쇼트-쇼트’

등록 2007-09-07 19:01

<호시 신이치의 플라시보 시리즈>
<호시 신이치의 플라시보 시리즈>
장르소설 읽기 / <호시 신이치의 플라시보 시리즈> 호시 신이치 지음/지식여행·각 권 8900원

최근 몇 년 사이에 일본 소설들이 쏟아지다시피 출판되고 있다. 장르나 작가의 비중이나 개별 작품의 수준 등이 천차만별이지만 옥석을 가릴 안목이 모자란 독자로서는 혼란스러울 지경이다. 그렇다면 이런 접근은 어떨까? 그 모든 일본 작가들, 아마 한 명도 빠짐없이 100% 모두에게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주었을 작가의 작품을 골라보는 것은? 현대 일본 대중문학사에서, 특히 에스에프(SF)문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름, 바로 ‘쇼트-쇼트(short-short)’의 대가 호시 신이치가 그런 작가이다. 쇼트-쇼트란 원고지 10매 안팎의 아주 짧은 소설을 일컫는 말이다. 꽁트보다 더 짧은, ‘마이크로픽션’ 혹은 장편(掌篇)에 해당하는 형식이다. 호시 신이치는 1997년에 작고할 때까지 그런 쇼트-쇼트를 1000편 이상 썼다.

그의 작품을 처음 읽은 것은 30년쯤 전의 일로 기억된다. 30대 이상 독자들이라면 추억에 젖을 이름 ‘아이디어회관 에스에프전집’에서 와다 마코토의 일러스트와 함께 접했던 그의 초단편들은 당시 초등생이었던 나에게도 꽤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그의 작품들은 몇 년에 한 번씩 잊을 만하면 번역서가 나오곤 했는데, 솔직히 성인이 된 다음에는 평가절하를 하기도 했었다. ‘뭐 아주 짧으니까 부담 없이 보는 거지, 아이디어에 깊은 통찰이 담겼다기보다는 그냥 기발함뿐이잖아’ 정도의 느낌이었다. 일본에선 전집이 출간되고 교과서에까지 실렸다고 하지만 잘 납득이 안 되었다.

그런데 최근에 출간되고 있는 그의 전집들을 하나씩 보면서, 그동안 내 선입견이 잘못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알고 보니 그동안 번역된 그의 작품들은 상대적으로 가볍고 정말 짧은 작품들만 선별적으로 소개되었던 것이다. 이번에 국내에는 처음 선을 보이는 그의 작품들 중에는 길이도 쇼트-쇼트보다 꽤 길고 아이디어도 단순한 발상 차원을 넘어 상당한 사색을 담은 모던판타지, 혹은 사회학적 추론소설(speculative fiction)이라고 할 만한 내용들이 많다. 이를테면 단순한 강도 모의가 어떻게 해서 국가 전복의 쿠데타 음모로 발전하는지, 행복한 결혼을 앞둔 청년이 왜 인류 역사의 모든 비극을 끌어안고 괴로워해야 하는지 등등. 특히 평범한 샐러리맨이 사회와 제도의 온갖 허점들 사이에서 가련한 운명의 나락으로 빠지고 마는 이야기들이 많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선택의 기로에 선 주인공에게는 오 헨리 식의 반전으로 마무리되는 해피엔딩조차 주어지지 않는데, 이런 냉정하고 담담한 시각은 예전에 호시 신이치에게서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면모이다.

그래도 어느 독자는 말할 것이다. 역시 남는 건 그다지 없지 않냐고. 더 나아가서 이런 의문도 들 법하다. 혹시 일본 소설들에서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뭐라고 표현하기 힘든 그 경박단소함의 형성에 혹시 호시 신이치같은 작가가 상당 부분 기여한 건 아닐지?

박상준/월간 <판타스틱> 편집주간
박상준/월간 <판타스틱> 편집주간
아마도 그렇게 느껴지는 이유는 이야기가 너무 짧아서일 것이다. 그의 작품들은 세밀한 감정이나 상황 묘사는 없이 오로지 아이디어에 따른 스토리만 요약한 것이기에, 독자가 깊이 감정이입을 할 여지가 적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보르헤스의 언급처럼 모든 군더더기를 뺀 소설은 단편 형식이면 충분하다는 말이 호시 신이치에게도 적용되지 않을까? 보르헤스의 정수가 근원적인 통찰이라면 호시 신이치의 미덕은 그 무궁무진한 아이디어인 것이다. 박상준/월간 <판타스틱> 편집주간 psj@fantastiqu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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