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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신이 죽어버린 기독교’ 외설스러운 재해석

등록 2007-08-10 19:09수정 2007-08-10 19:15

<죽은 신을 위하여>
<죽은 신을 위하여>
철학자 지젝의 또 하나의 반역
“예수는 사랑의 과업 실천한 혁명가”
“기독교 제도 버려라” 불온한 선동
<죽은 신을 위하여>
슬라보예 지젝 지음·김정아 옮김/길·2만원

슬라보예 지젝은 옛 유고연방 출신의 철학자다. 슬로베니아 학파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최신 사상의 중심이자 태두가 지젝이다. 20세기 사상의 거목들이 쓰러진 자리에서 그의 사상적 지위는 거의 독보적으로 빛난다. 국내에서도 그는 소수이지만 맹렬한 지적 사도들을 거느리고 있다. 지난 10여 년 사이 그의 거의 모든 주요 저작이 우리말로 번역된 것은 그에게 쏠리는 관심의 강도를 보여준다.

지젝의 사상은 옛 유고연방이라는 지역적 특수성 속에서 영근 것이다. 스탈린주의의 영향권 아래 있었던 이 발칸의 다민족국가는 소련의 헤게모니가 무너지면서 급속한 ‘자유화’ 과정을 겪다가 민족주의의 광기 어린 폭발로 만신창이의 상처를 입었다. 한때 ‘서구식 민주화’에 기대를 걸었던 지젝은 그 민주화의 결과가 아무런 해방의 전망도 제시하지 못한 채 파멸적 재앙으로 귀결하는 것을 보면서 서구식 민주주의에 대한 기대를 접었다.

애초에도 삐딱하고 반주류적이었던 그의 사상은 더욱 발본적이고 급진적이고 과격한 국면으로 나아갔다. 특이한 것은 20세기 후반의 체제 반란적 사상운동을 이끌었던 포스트모더니즘(탈근대주의)에 대립하는 지점에 그가 서 있다는 사실이다. 지젝은 칸트에서 헤겔에 이르는 독일 정통 관념론을 이어받고 자크 라캉의 ‘정통적’ 정신분석학을 그 흐름에 접목해 매우 정통적인 방식으로 반역적 사상을 펼치고 있다. 이번에 번역된 〈죽은 신을 위하여〉에서도 그는 헤겔과 라캉을 위시한 유럽 정통 사상을 입론의 주춧돌로 삼고 있다. 그러나 그 정통의 세례를 받은 그의 사상은 거의 외설스러울 정도로 반정통적이다.

케테 콜비츠 작 〈짓밟힌 자〉(부분도, 1900)
케테 콜비츠 작 〈짓밟힌 자〉(부분도, 1900)
〈죽은 신을 위하여〉는 ‘기독교 비판 및 유물론과 신학의 문제’라는 부제가 얼핏 보여주는 대로 기독교에 대한 오래된 해석체계를 전복하는 작업이다. 요약하자면, 기독교를 유물론적으로, 다시 말해 신이 없는 종교, 신이 죽어버린 종교로 재해석하자는 것이다. 더욱 불온한 것은 그리스도를 20세기 혁명가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과 연결지어 이해하는 방식에 있다. 요컨대, 예수를 종교상의 레닌으로, 유물론적 혁명가로 이해하는 것이다.

지젝의 기독교 해석의 관점을 지젝 자신의 목소리로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여기서 나의 주장은, 내가 뼛속까지 유물론자라거나, 기독교의 전복적 핵심은 유물론적 방법을 통해서도 접근할 수 있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다. 나의 주장은 훨씬 더 강도 높은 것이다. 기독교의 전복적 핵심은 오로지 유물론적 접근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으며, 역으로 진정한 변증법적 유물론자가 되기 위해서는 기독교적 경험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지젝은 이 논의를 펼치기에 앞서 오늘날 서구에서 기독교의 대안으로 자주 거론되는 불교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먼저 풀어놓는다. 그가 불교를 이야기하는 것은 기독교의 폭력적·독재적 전횡을 중화시키거나 치유할 방법이 불교에 있다는 생각이 널러 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서구에 이식돼 유통되는 ‘서양 불교’를 단호하게 부정한다. “서양 불교는 광란의 시장 경쟁 속도에 대하여 내적 거리를 두고 무관심할 것을 설교하는 대중문화의 한 현상이다. 이는 정신 건강을 유지하는 듯 보이면서 자본주의 역학에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완벽하게 참여하는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요컨대, 이는 후기 자본주의의 전형적 이데올로기다.”

‘서양 불교’의 원형인 ‘동양 불교’도 그는 대안이 될 수 없다고 단언한다. “일본의 사례가 결정적 근거다.” 그는 일본 군국주의와 선을 결합했던 일본 선사 스즈키 다이세쓰의 선사상을 사례로 끌어들인다. “군국주의적 선지도자들은 선의 기본적 메시지를 순진한 군사적 충성, 곧 명령에 즉각 복종하고 자아의 이익을 고려하지 않고 자기의 임무를 다하는 것과 동일한 것으로 해석한다.” 문제는 무념무상이라는 불교의 내적 평화의 원리에 있다. ‘분별적 사고를 중지하고 무의 상태로 돌입하는 것’이 윤리적 판단 자체를 거부하게 만든다는 것이 지젝의 지적이다. 그런 무차별의 종교에서는 진정한 혁명도 사랑도 불가능하다고 지젝은 판단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즉각 기독교를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의 목표는 ‘유신론적 기독교’를 해체하고 전복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정통 기독교의 원리를 뿌리부터 잘라 버리는 것이다. 그가 보기에 기독교는 신의 죽음 위에 성립된 종교다. 〈신약성서〉에서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가 최후에 외치는 말, “아버지, 왜 저를 버리시나이까?”라는 구절이 결정적이다. 지젝은 이 말로써 그리스도 자신이 기독교가 범할 수 잇는 궁극의 죄를 범했다고 말한다. 바로 믿음을 부인하는 죄다. “그리스도가 죽을 때, 그와 함께 죽은 것은 아버지가 존재한다는 소망이다.” 말하자면, 기독교는 이렇게 ‘신이 없다’는 확인에서 출발한 종교다.

한스 홀바인 작 〈죽은 그리스도〉(1521)
한스 홀바인 작 〈죽은 그리스도〉(1521)
이런 역설 혹은 도착은 예수의 행적 곳곳에서 발견된다. 유다의 배반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예수가 유다의 배반을 사전에 몰랐을까? 몰랐을 리 없다. 지젝은 여기서 유다의 배반이 기독교의 성립에 필수적임을 지적한다. 유다의 배반을 통해 예수는 십자가에 못박히고 진정한 구원자로 등극한다. 유다는 배반 행위를 통해 예수의 혁명사업을 적극적으로 실행한 일종의 영웅이다. 왜 영웅인가. 유다는 영원히 예수의 배신자라는 오명을 뒤집어쓸 것을 알면서도 예수를 위해 배반을 저지른 인간이기 때문이다. 전적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전적으로 배신하는 것이다. 지젝은 예수가 유다에게 이렇게 은밀히 명령했다고 추정한다. “내가 너의 전부임을 보여라. 그러려면 우리 둘 다를 위한 혁명 과업을 위해 나를 배반하라.” 그런 사랑의 배반 행위를 통해 그리스도가 성립했다. 그 그리스도는 지젝이 보기에 혁명가다. ‘사랑의 과업’을 실현하려고 목숨을 던진 혁명가다. 그 혁명가는 우리와 같은 인간이며,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며, 우리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초인이다. 그 초인의 진정한 모습을 찾으려면 신이라는 관념에 입각해 구축된 기독교 제도를 버려야 한다. 그렇게 지젝은 말한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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