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스카나, 달콤한 내 인생>
한미화의 따뜻한 책읽기 / <토스카나, 달콤한 내 인생> 필 도란 지음·노진선 옮김. 푸른숲·1만1000원
얼마 전만 해도 가이드를 대동하고 단체여행을 하고 와서 여행기를 내겠다던 어르신들이 있었다. 여행이란 어디를 갔느냐보다 무얼 했느냐가 더 중요하지만 어디를 갔다는 게 화제가 될 수 있었던 때의 일이다. 이제는 장기체류하는 자유여행이 유행이다. 소설가 김영하는 여행자를 자처하며 8개 도시를 여행하고 책을 낸다 하고, 아나운서 손미나는 좋은 직장을 그만두고 여행 작가로 살겠다고 한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그림의 떡이다. 은퇴 전에는 생활인으로 허덕이느라 시간이 없고, 은퇴 후에는 필경 돈이 없다.
〈케빈은 열두 살〉로 알려진 드라마 작가 겸 제작자 필 도란은 이런 점에서 배부른 자에 속한다. 이탈리아 피렌체 아래 토스카나 지역의 캄비오네 마을 언덕 위에 있는 집을 한 채 샀으니까. 〈토스카나, 달콤한 내 인생〉은 그가 할리우드를 뒤로하고 토스카나에 정착하는 이야기다. 비슷한 책으로 영국인이 프로방스에 집을 사고 겪은 이야기를 담은 〈나의 프로방스〉도 있다. 하지만 필 도란의 이야기는 〈나의 프로방스〉보다 10배쯤 재미나다. 〈나의 프로방스〉의 부부가 시종일관 프로방스에 매혹되어 있다면, 〈토스카나, 달콤한 내 인생〉의 필 도란은 토스카나 사람들을 원수로 여긴다. 재미는 여기에서 나온다. 이탈리아적인 것을 부정하던 그가 어떻게 훗날 ‘이탈리아 사람들이 세상을 지배해야 한다’고까지 말하게 되었나를 추적하는 재미가 있다.
하지만 한때 잘나갔을 뿐 필 도란은 쉰 살이 넘자 방송사에서 퇴물 취급을 받는다. 하루에도 몇 번씩 우울과 회한이 왔다 갔다 한다. 여기서 벗어나고자 토스카나를 선택했지만(실은 아내에게 떠밀려 갔다), 도시인으로 살아온 그에게 토스카나는 이해할 수 없는 곳이다. 왜 점심시간이 네 시간일까, 왜 집에 자동응답기가 없지, 왜 이탈리아인들은 차를 막아 가면서 이야기를 하지, 왜 모든 레스토랑이 저녁 여덟시 이전에는 영업을 하지 않는지 답답해서 환장할 지경이다. 게다가 토스카나 사람들은 입만 열면 거짓말이다. 전화세를 전액 삭감해주겠다고 해서 전셋집을 계약했더니 전화도, 전화선을 꽂을 콘센트도 아예 없다. 그 와중에 필 도란 부부가 산 언덕 위의 집을 다시 쟁취하려는 이웃과의 소동이 벌어지고, 서류상으로 존재한 적도 없는 무허가 건물임도 밝혀진다. 과연 이들이 언덕 위의 집에서 살 수 있을까 측은지심이 들기까지 한다.
하지만 토스카나 사람들과 부대끼다 보니 필 도란조차 과거보다 모든 일이 덜 급해졌다. 생체 시계도 변했는지 시간도 훨씬 천천히 흘러갔다. 그토록 흉을 본 토스카나 사람들처럼 감정을 숨기지 않고 울고 소리지르고 호탕하게 웃을 수 있게 되었다. 온전하게 자신의 삶을 느끼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의문이다. 필 도란이야 은퇴했으니 좀 천천히 살아도 되지만 이탈리아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도 괜찮을까. 국민이 의욕을 갖고 열심히 일하면 앞으로 경제성장률 7%, 국민소득 4만 불, 세계 7위의 경제대국이 될 수 있다고 한 대선 후보가 말하던데, 천천히 살고 있는 이탈리아는 현재 세계 7위의 경제대국이다.
한미화 / 출판칼럼니스트
한미화 출판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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