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권우/도서평론가
이권우의 요즘 읽은 책 / <남한산성>
김훈 지음. 학고재 펴냄 <남한산성>은 딜레마에 관한 이야기다. 어느 쪽으로 발을 내딛더라도 낭떠러지이기는 매일반이다. 한 쪽은 대의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힘으로 삶을 열어나가는 것”이니, 김상헌이 그곳에 우뚝 서 있다. 다른 쪽은 방편이다. “죽음은 견딜 수 없고 치욕은 견딜 수 있는 것”이라, 그곳에 최명길이 엎드려 있다. 눈물이 그득할 수밖에 없다. 이 긴장의 줄을 끊어버리는 보신의 자리에 김류가 있다. “싸움의 형식을 유지하면서 그 형식 속에서 버티는 힘을 소진시키고 소진의 과정 속에서 항전의 흔적을 지워가며 그날을 맞아야 할 것”을 고민했고, “돌을 써야 할 날이 온다면 돌을 쓸 필요가 없을 터이니 돌을 써야 할 날이 없어야 할 줄” 안다고 아뢰었다. 어디 그뿐인가. “몫을 줄이면 날짜가 늘어나고 날짜를 줄이면 몫이 커지는 것이온데, 끝날 날짜를 딱히 기약할 수 없으니 몫을 날짜에 맞추기도 어렵고 날짜를 몫에 맞추기도 어렵”다고 사뢰었다. 긴장은 무화되고 눈물은 증발한다. 왜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최명길은 말한다. “대의로 쏠려서 사세를 돌보지 않”아서라고. 어찌 오랑캐를 섬길 수 있겠는가. 소화로서 중화를 섬겨야 마땅하다고 여겼다. 그것이 화를 불러왔음에도 사세를 정확히 읽자는 이를 목베어야 한다는 소리가 높았다. 명의 멱살을 잠시 풀어놓고 조선으로 온 칸은 이해하지 못했다. “스스로 강자의 적이 되는 처연하고 강개한 자리에서 돌연 아무런 적대행위도 하지 않는 그 적막”을 말이다. 대의를 지킬 힘도 없는 무리들에 대한 조소이기도 하다. 이 딜레마에서 벗어나려면 어찌해야 하는가. 최명길이 닫힌 성문을 열고 길을 닦는다. 상헌은 우뚝하고 충직하니 충렬의 반열에 올려야 마땅하다. 그러나 자기의 뜻을 따라 달라고 임금에게 말했다. “세상이 모두 불타고 무너진 풀밭에도 아름다운 꽃은 피어날 터인데, 그 꽃은 반드시 상헌의 넋일 것”이나, 자신은 훗날을 기약하기 위해 만고의 역적이 되려 한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전하, 신을 적진에 보내시더라도 상헌의 말을 아주 버리지는 마소서.” <남한산성>을 읽다보니, 어느덧 우리 문학이 부여잡은 화두가 ‘살아남기’인 듯싶다. 1990년대 일군의 여성작가들이 선동했다. 살아남으려면 바람이라도 피우라고. 아마도 종교는 죽음을 요구했으리라. 더럽혀지느니 지키는 것이 낫다고 여기니까. 이제 김훈은 우리를 충동질한다. “죽음은 견딜 수 없고 치욕은 견딜 수 있는 것”이며, “살기 위해서는 가지 못할 길이 없고, 적의 아가리 속에도 삶의 길은 있을 것”이라고. 아마도 이념이라면 죽음을 택하라 강요했을 듯하다. 그것이 정치적으로 순결하므로. 문학이 삶의 자리에 있는 것은 마땅하다. 그때 비로소 지치고 상처받은 영혼들이 위안과 격려를 얻을 터다. 하나, 삶의 자리가 “강한 자가 약한 자에게 못할 길이 없고, 약한 자 또한 살아남기 위하여 못할 짓이 없는 것”에 이를 때는 지극히 위험하다. 김훈은 대의를 아우른 방편을 아름답다 했다. 나는 방편을 보듬는 대의를 꿈꾼다. 그것이 없다면, 치욕으로 버틸 삶의 의미마저 소멸될 터이므로. 이권우/도서평론가
김훈 지음. 학고재 펴냄 <남한산성>은 딜레마에 관한 이야기다. 어느 쪽으로 발을 내딛더라도 낭떠러지이기는 매일반이다. 한 쪽은 대의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힘으로 삶을 열어나가는 것”이니, 김상헌이 그곳에 우뚝 서 있다. 다른 쪽은 방편이다. “죽음은 견딜 수 없고 치욕은 견딜 수 있는 것”이라, 그곳에 최명길이 엎드려 있다. 눈물이 그득할 수밖에 없다. 이 긴장의 줄을 끊어버리는 보신의 자리에 김류가 있다. “싸움의 형식을 유지하면서 그 형식 속에서 버티는 힘을 소진시키고 소진의 과정 속에서 항전의 흔적을 지워가며 그날을 맞아야 할 것”을 고민했고, “돌을 써야 할 날이 온다면 돌을 쓸 필요가 없을 터이니 돌을 써야 할 날이 없어야 할 줄” 안다고 아뢰었다. 어디 그뿐인가. “몫을 줄이면 날짜가 늘어나고 날짜를 줄이면 몫이 커지는 것이온데, 끝날 날짜를 딱히 기약할 수 없으니 몫을 날짜에 맞추기도 어렵고 날짜를 몫에 맞추기도 어렵”다고 사뢰었다. 긴장은 무화되고 눈물은 증발한다. 왜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최명길은 말한다. “대의로 쏠려서 사세를 돌보지 않”아서라고. 어찌 오랑캐를 섬길 수 있겠는가. 소화로서 중화를 섬겨야 마땅하다고 여겼다. 그것이 화를 불러왔음에도 사세를 정확히 읽자는 이를 목베어야 한다는 소리가 높았다. 명의 멱살을 잠시 풀어놓고 조선으로 온 칸은 이해하지 못했다. “스스로 강자의 적이 되는 처연하고 강개한 자리에서 돌연 아무런 적대행위도 하지 않는 그 적막”을 말이다. 대의를 지킬 힘도 없는 무리들에 대한 조소이기도 하다. 이 딜레마에서 벗어나려면 어찌해야 하는가. 최명길이 닫힌 성문을 열고 길을 닦는다. 상헌은 우뚝하고 충직하니 충렬의 반열에 올려야 마땅하다. 그러나 자기의 뜻을 따라 달라고 임금에게 말했다. “세상이 모두 불타고 무너진 풀밭에도 아름다운 꽃은 피어날 터인데, 그 꽃은 반드시 상헌의 넋일 것”이나, 자신은 훗날을 기약하기 위해 만고의 역적이 되려 한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전하, 신을 적진에 보내시더라도 상헌의 말을 아주 버리지는 마소서.” <남한산성>을 읽다보니, 어느덧 우리 문학이 부여잡은 화두가 ‘살아남기’인 듯싶다. 1990년대 일군의 여성작가들이 선동했다. 살아남으려면 바람이라도 피우라고. 아마도 종교는 죽음을 요구했으리라. 더럽혀지느니 지키는 것이 낫다고 여기니까. 이제 김훈은 우리를 충동질한다. “죽음은 견딜 수 없고 치욕은 견딜 수 있는 것”이며, “살기 위해서는 가지 못할 길이 없고, 적의 아가리 속에도 삶의 길은 있을 것”이라고. 아마도 이념이라면 죽음을 택하라 강요했을 듯하다. 그것이 정치적으로 순결하므로. 문학이 삶의 자리에 있는 것은 마땅하다. 그때 비로소 지치고 상처받은 영혼들이 위안과 격려를 얻을 터다. 하나, 삶의 자리가 “강한 자가 약한 자에게 못할 길이 없고, 약한 자 또한 살아남기 위하여 못할 짓이 없는 것”에 이를 때는 지극히 위험하다. 김훈은 대의를 아우른 방편을 아름답다 했다. 나는 방편을 보듬는 대의를 꿈꾼다. 그것이 없다면, 치욕으로 버틸 삶의 의미마저 소멸될 터이므로. 이권우/도서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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