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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주역 ‘정통’ 해석들은 헛소리

등록 2007-05-10 16:26수정 2007-05-10 23:01

<주역의 발견> 문용직 지음. 부·키 펴냄·1만6000원
<주역의 발견> 문용직 지음. 부·키 펴냄·1만6000원
‘역경’은 철학적 텍스트 아닌 점사(점친 내용)를 기록한 보고서
점사는 기록을 분류·정리한 것일 뿐 서로 연관성 없어
괘·효 바탕해 해석해온 상수학·의리학 토대 흔들어
<주역의 발견>은 만만찮은 책이다. 그 만만찮음은 우선 ‘발견’의 대상인 <주역>이 동아시아 고전 가운데 가장 난이도 높은 텍스트라는 사실에서 비롯한다. 그 언어가 고대 한문으로 쓰였다는 점, 사태를 매우 축약해 서술하고 있다는 점, 후대의 해석자마다 그 뜻을 두고 중구난방이었다는 점 들이 이 고전 텍스트를 이해하는 데 거대한 장애물로 서 있다. <주역의 발견>이 만만찮은 더 결정적인 이유는 이 책이 <주역>에 대한 권위 있는 해석으로 통용되던 정통적 견해들을 과감하게 뒤엎었다는 데 있다. ‘상수와 의리가 무너진 주역의 본질’이라는 이 책의 부제는 그 뒤엎음의 사태를 요약해서 보여준다. 상수학과 의리학은 지난 2000여년 동안 <주역>을 이해하는 방식을 놓고 다툰 두 갈래 학파인데, 이들이 모두 <주역>의 원리를 이해하지 못한 채 헛소리를 늘어놨다는 게 이 책의 주장이다.

이런 파격적 주장을 편 지은이 문용직씨(사진)는 영문학과 정치학을 전공하고 현재는 직업 기사(프로 바둑 5단)로 활동하는, <주역> 연구에 관한 한 아웃사이더라고 할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전문가라고 해서 주역의 본질을 더 잘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단언한다. 오히려 <주역> 전문 연구자들이 <주역>에 대한 정통 해설을 비판 없이 받아들임으로써, 똑같은 오류를 되풀이한다고 그는 말한다. <주역>의 근본을 꿰뚫어볼 능력만 있다면 오히려 아웃사이더가 <주역>을 이해하는 데 유리하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지은이는 고고학적 성과와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 그리고 인지언어학을 지렛대로 삼아 <주역> 해석의 전복을 시도한다.

이 책의 파격적인 주장 가운데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이 <역경>과 <역전>의 분리다. 흔히 <주역>으로 통칭하는 텍스트는 원텍스트인 <역경>과 파생 텍스트인 <역전>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 구분은 누구나 다 하는 것이다. 지은이의 관점이 드러나는 곳은 <역경>과 <역전>의 텍스트 성격을 명확하게 분리하는 지점이다. 지금까지는 대체로 <역경>이든 <역전>이든 어떤 심오한 삶의 의미를 지닌 철학적 텍스트로 이해됐다. 그러나 지은이는 <역경>을 ‘재현’의 텍스트로, <역전>을 ‘설명’의 텍스트로 이해한다. <역경>이란, 점을 관장하던 고대 지식인들이 제출한 보고서의 모음이라는 것이다. 점을 친 결과가 실제의 사태와 맞아떨어졌을 때 그 사태를 기록해놓은 것, 다시 말해 사실의 재현이 <역경>의 내용이다. 그러므로 그 내용에는 아무런 철학적 해석이 없다. 반면에, <역전>은 <역경>의 내용을 재해석한 후대의 2차 저작물이다. 지은이는 <역경>의 성립 시기를 은말 주초인 기원전 12세기께로 본다. <역전>의 성립 시기는 기원전 3세기 전국시대 말기까지 이어진다.

‘재야’ 연구자 문용직씨 파격 분석

<주역의 발견> 저자 문용직씨
<주역의 발견> 저자 문용직씨
지은이의 더 중요한 관점은 <역경>의 구조를 이해하는 방식에 있다. <역경>은 64괘의 괘사와 386개의 효사를 합쳐 모두 450개의 점사(점친 결과를 써놓은 말씀)로 이루어져 있다. 괘마다 6개의 효사가 딸려 있다. 지금까지는 그 450개의 점사가 어떤 특정한 형상이나 관념에서 도출된 것이라고 이야기돼 왔다. <역전>의 일부인 <계사전>에서 태극이 양의(음과 양)을 낳고 양의가 4상을 낳고 4상이 8괘를 낳았다고 한 것이 그런 이야기의 대표적인 경우다. 따라서 64괘는 8괘에서 도출된 것이고, 386개의 효사는 괘의 모양을 보고 의미을 찾아내 붙인 것이라는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그러나 지은이는 이런 연역적 도출은 없었다고 단언한다. 고고학적 자료를 살피면, <역경>이 성립할 즈음, 당대 사람들이 수없이 많은 점을 쳤으며, 그 점의 결과 가운데 유사한 내용끼리 묶어 점사로 요약하고 그것들을 다시 450개의 점사로 분류해 정리한 것이 현재의 <역경>임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도서관에서 책을 분류해 정리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방식이었다. 초기에는 괘상이 숫자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후대에 와서 오늘날과 같이, 양효(-)와 음효(--)를 여섯 개 겹쳐 놓은 모양으로 변형됐다고 그는 설명한다. 그러므로 모든 점사는 그것이 효사든 괘사든 역사적으로 볼 때 독립적으로 성립된 것이며 서로 아무런 관련이 없다. 예를 들어, 건괘의 괘사인 ‘원형이정’과 그 아래 딸린 여섯 개의 효사는 아무런 관련이 없고, 또 건괘의 효사인 ‘잠룡물룡’(첫 번째 효사)과 ‘항룡유회’(여섯 번째 효사)도 서로 아무런 직접적 관련이 없다. 비슷한 것끼리 묶어 놓았을 뿐 서로 독립적으로 성립된 것들이라는 것이다.

이런 설명을 전제하면, 괘의 모양이나 효의 위치를 놓고 이야기하는 상수학은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것이 되고 만다. 또 상수학을 기초로 삼아 점사의 의미를 철학적으로 따진 의리학도 근거가 사라지는 것은 마찬가지다. 이를테면, 어떤 효가 6획괘에서 몇 번째 자리에 놓이느냐를 따지는 것도 무의미하고, 특정한 효가 중심에 바르게 자리잡았다고 하여 길하다고 이야기하는 ‘중정’(中正)이란 말도 의미를 잃는다. ‘상수와 의리가 무너진 주역의 본질’이라는 이 책의 부제는 바로 이 지점을 두고 하는 말이다.

점사는 삶의 패턴 보여줘


그렇다고 해서 지은이가 주역점의 효능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주역점은 미래를 예측하거나 행동의 방향을 정할 때 길을 제시하는 기능을 한다는 것이다. 삶의 패턴은 수없이 다양한 것 같지만 수십 혹은 수백 가지 정도로 한정돼 있고 역경의 점사는 이 패턴을 알려준다는 것이다. <역경>의 점사가 삶의 패턴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은 그 내용이 고도로 응축된 ‘은유’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지은이의 주장이다. <역경>의 언어가 은유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적용의 폭이 넓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주역>, 특히 <역전>의 철학적 내용은 모두 쓸모없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그것들은 인간의 지혜가 농축된 것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삶을 이해하는 데 훌륭한 지침이 될 수 있다. 다만, 그 철학적 내용이 <역경>의 본질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성립된 것이기 때문에, 해석자의 세계관에 따라 여러 해석이 나올 수 있고, 특히 권력을 가진 자에게 유리한 해석이 담기기 쉽다고 지은이는 이야기한다. 글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사진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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