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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영어에 빠져 살려다 영어에 빠져 죽을라

등록 2007-04-05 19:45

<영어, 내 마음의 식민주의>윤지관 책임편집. 당대 펴냄. 1만5000원
<영어, 내 마음의 식민주의>윤지관 책임편집. 당대 펴냄. 1만5000원
월 100만원대 영어유치원 호화 ‘양어 광풍’ 휩싸인 한국
“영어교육 통해 제국주의적 지배·악압이데올로기 전파”
영어에 대한 반성적 시각 담은 글 17편 추려 엮어내
“아시아와 제3세계 연대 위한 언어로 변화시켜야” 조언
우리 사회는 ‘영어 광풍’이 불고 있다. 해외 영어연수가 대학생의 필수과정이 된 지 오래다. 지금은 초등학생 단계까지 내려왔다. 월 100만원대의 어린이 영어유치원도 호황이다. 국내 영어 사교육 시장은 한해 10조원 규모로 추정된다. 공교육에서도 초등학교 3학년부터 영어를 가르친다. 10살 남짓때부터 영어에 대한 흥미와 능력의 양극화가 시작되고, 중학교 쯤 가면 제법 영어를 하는 학생과 알파벳도 완전히 익히지 못한 학생이 한 교실에 섞여 수업을 받는다.

<영어, 내 마음의 식민주의>(당대 펴냄)는 최근 10여년 동안 국내에 발표됐던 영어에 대한 반성적 시각의 담은 글들을 추려 엮은 책이다. △우리에게 영어는 무엇인가 △영어, 어떻게 배우고 가르쳐야 하나 △영어의 지배,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라는 3개의 주제를 큰 얼개 삼아, 영문학자·사회학자·언어학자들이 쓴 17편의 글을 실었다.

우리 사회가 영어를 본격적으로 접한 것은 100여년 전. 강내희 중앙대 교수는 ‘식민지시대 영어교육과 영어의 사회적 위상’에 주목한다. 한국 근대소설의 효시라는 <혈의 누>(이인직, 1906년)에는 미국 유학파 출신의 남녀 주인공 구완서와 김옥련이 정분을 나누는 대목이 나온다.

구씨는 본래 활발하고 거칠 것 없이 수작하는 사람이라 옥련이를 물끄러미 보더니, “이애 옥련아, (중략) 우리가 입으로 조선말은 하더라도 마음에는 서양 문명한 풍속이 젖었으니, 혼인을 하여도 서양 사람과 같이 부모의 명령을 좇을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서로 부부 될 마음이 있으면 서로 직접하여 말하는 것이 옳은 일이다. 그러나 우선 말부터 영어로 수작하자. 조선말로 하면 입에 익은 말로 외짝해라하기 불안하다”하면서 구씨가 (중략) 서투른 영어로 수작을 하는데, 옥련이는 조선말로 단정히 대답하더라.

이것 말고도, 이광수의 <무정>, 현진건의 <희생화> 등 개화기 문학작품들에서 영어를 하는 인물을 찾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구한말 지배계층 엘리트나 지식인 절대다수는 미국 문물을 직·간접으로 경험했거나 독학으로라도 영어를 익혔다. YMCA는 영어를 배울 수 있는 최초의 대중 공간이었다. 영어는 처음부터 우리에게 여러 언어 중의 하나가 아니라 ‘새 시대 개화문명’의 상징으로 들어온 셈이다. 분단과 미군정, 한국전쟁과 냉전은 우리 사회에서 미국과 영어에 ‘주류 지배권력’의 무게를 얹었다.

구한말 ‘새 시대 개화문명’의 상징

최샛별 이화여대 교수는 한국사회에서 영어실력을, 부르디외의 개념을 빌어 ‘문화자본’ 내지 ‘구분짓기’와 ‘계급재생산’의 중요한 기준으로 봤다. 한국사회에서 영어를 잘한다는 것은 단순히 한 가지 외국어를 잘한다는 것을 넘어, 개인적 능력과 사회적 성공의 척도가 된다. 최 교수는 전국 6개 대학생 1719명을 대상으로 부모의 소득·학력·직업과 자녀의 영어에 대한 자신감의 상관관계를 설문조사한 결과가 이를 뒷받침한다. 예컨대, 월소득 500만원 이상 가구의 자녀 29.2%가 “영어에 자신 있다”고 답한 반면, 150만원 미만 가구에서는 9.9%에 그쳤다. 또 부모의 직업이 고학력, 전문·관리직일수록 “자신 있다”는 응답이 많았다.

이승렬 영남대 교수는 “한국사회에서 영어의 매혹은, 영어가 이 땅의 지배적 이념의 전달자로 자리잡게 됐다는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짚는다. 일각에서 영어공용화론이 나오는 배경도 이러한 사회언어학적 맥락에서 분석된다. 이런 사정은 자본주의적 세계화 물결과 무관하지 않다.


지나친 외국어 조기교육의 부작용에 대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의 호들갑에 가까운 영어 광풍은 코흘리게 아이들까지 장악하고 있다. 서울의 한 영어유치원에서 어린이가 알파벳을 익히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지나친 외국어 조기교육의 부작용에 대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의 호들갑에 가까운 영어 광풍은 코흘리게 아이들까지 장악하고 있다. 서울의 한 영어유치원에서 어린이가 알파벳을 익히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윤지관 덕성여대 교수는 “영어의 확산이 그 이전의 지배적 언어였던 라틴어나 프랑스어와 그 성격을 달리하는 것은 그 기원이 자본주의의 발흥과 때를 같이하고 있”으며, “영국에 이어 미국이 패권을 장악한 금세기에 이르러 영어는 이 시대에 가장 자연스럽고 보편적인 매개체가 된다”고 갈파한다. 영어가 ‘중립적 언어’가 아니라 필연적으로 제국주의적 성격을 지닌 지배·억압이데올로기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이데올로기가 영어교육체계를 통해 청소년기부터 성인에 이르기까지 알게 모르게 전파되고 학습된다는 것이다.

그럼 어떡해야 하나?

원로 영문학자 김진만은 영어에 대한 강박이 오히려 올바른 영어교육을 저해하는 현실을 ‘인권유린 수준’이라고 질타하면서, “교양 있고 지적 균형이 잡힌 국제인을 만들기 위”한 방향으로 영어교육 철학이 바뀌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박찬길 이화여대 교수가 자신의 유학 경험을 전하면서 진정한 영어실력은 자기 생각과 주장을 적절한 표현으로 조직해내는 ‘사고력’과 어휘력에 있음을 강조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일본 쓰다대학에서 영어를 가르친 더글라스 루미스는 한발짝 더 나간다. “중요한 것은 영어를 문화지배의 언어가 아니라 아시아와 제3세계의 연대를 위한 언어로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영어회화 교재들이 수강생들의 체질에도 맞지 않은 ‘미국식 개성’을 끊임없이 강요하고, 그런 어색한 상태에서 서로 대화를 나누라고 한다”는 비판도 우리네 풍경과 꼭 닮았다.

‘미국식 개성’ 강요하는 회화교재

언어는 한 집단의 얼을 담는 그릇이자 문화의 총체이다. 윤지관 교수는 이 책의 제목이 된 마지막 글에서 알제리의 사회철학자이자 반제투쟁가였던 프란츠 파농의 <검은 피부, 흰 가면>(1978년 번역본 제목은 ‘자기 땅에서 유배당한 자들’)을 떠올린다. 자신의 민족성을 감추고 서구를 모방하고자 하는 욕망이 식민지인들의 의식을 왜곡시켜 위선적이 되게 하고, 결국 자신의 정체성을 위기에 빠뜨린다는 것.

영어는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의사소통수단이자 국제협상을 비롯한 외교 언어의 지위를 가지고 있다. 이것만으로도 영어를 잘 할 이유와 필요성은 충분하다. “그러나 영어에 대한 숭배에 빠져 모국어가 자신의 삶에서 가지는 의미조차 망각하는 사람들은, 김남주 시인의 의역을 빌리자면, ‘자기의 언어에서 유배당한 것’이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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