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더니티의 지층들-현대사회론 강의> 이진경 엮어지음. 그린비 펴냄·2만원
이진경 등 ‘수유+너머’ 회원이 조망한 근·현대 체제
“체제 안에 비부르주아 공간 만들어야 자본주의 극복 가능”
“체제 안에 비부르주아 공간 만들어야 자본주의 극복 가능”
연구공간 ‘수유+너머’ 회원인 이진경(서울산업대 교수)씨와 이 연구집단의 다른 회원들이 함께 쓴 <모더니티의 지층들>은 ‘현대사회론 강의’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대학의 사회학 교양서로 쓰려는 뜻이 분명한 책인 셈이다. 그러나 대다수 사회학 개론서들이 주요 이론가들의 주장을 연대순으로 나열하는 것과는 달리, 이 책은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현대 사회와 그 사회를 창출한 근대 체제를 통째로 조망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여러 명의 필자가 참여했지만, 이진경씨의 기획과 주도 아래 집필된 것이어서 그의 관심과 지향이 책을 관통하고 있다. 카를 마르크스, 막스 베버, 미셸 푸코, 안토니오 네그리, 특히 질 들뢰즈의 사회이론이 이 책의 논리를 받치는 주춧돌 노릇을 한다.
현대를 알려면 이 시대를 포괄하는 지평으로서 근대를 알아야 한다. 그래서 이 책은 서구가 만들어낸 근대라는 시대의 본질적 특성을 규명하는 데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근대는 이성의 시대, 합리성의 시대다. 어떤 사회든 나름의 합리성이 작동하고 있지만, 근대 서구인들은 자신들이 세운 근대 체제만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세계라고 생각했다. 다른 사회는 모두 불합리하고 비이성적인 사회로 낙인찍었다. “근대에 출현한 합리성이 어느덧 합리성의 개념이나 척도를 독점해 버렸다.”
그렇다면 그렇게 독점적 지위를 차지한 서구의 근대적 합리성의 특징은 어디에 있는가? 이 책은 ‘계산 가능성’에서 그 특징을 찾는다. 근대적 합리성은 세상 만물을 수학적으로 계산 가능한 것으로 이해했다. 자연의 운동법칙을 수학 공식으로 설명한 것이야말로 근대적 합리성의 결정적 특성이다. 계산할 수 있다면 예측할 수도 있다. 예측할 수 있다면 통제할 수도 있다. 그리하여 수학에 기반한 과학의 발전은 자연을 지배하고 통제할 힘을 인간에게 주었다.
그러나 근대인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자연을 계산하고 예측하고 통제하는 그 지식을 이제 인간에게 적용한다. 인간 관계, 인간 사회가 계산과 예측과 통제의 대상이 된다. 계산하는 이성은 산업혁명을 낳고 산업혁명은 자본주의를 전면적으로 발달시킨다. 자본주의 질서 안에서 계산적 이성은 모든 것을 효율성과 생산성의 관점에서 본다. 최소비용으로 최대효과를 내는 것이 지상명령이 된다. 이 명령의 수행을 거부하거나 이행 능력이 없는 자는 도태당하고 쫒겨난다. 우리는 모두 그 자본주의의 체제 안에서 산다.
이 책은 그 자본주의를 ‘착취 체제’라고 규정한다. 잉여가치를 쥐어짜고 더 늘리는 것이 삶의 목적이 된 체제다. 대다수가 이 착취 체제의 피지배자다. 그런데도 자본주의 체제는 붕괴하지 않는다. 왜 그런가. 이 책은 화폐 증식의 욕망, 다시 말해 더 많은 돈을 벌려는 욕망을 모든 사람이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자본가의 욕망을 노동자도 똑같이 지니고 있다. 따라서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더 많은 것을 얻으려고 벌이는 투쟁은 체제를 더 강화할 뿐 그 체제를 해체하지 못한다. 욕망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자본주의 체제에는 오직 하나의 계급, 부르주아 계급만이 있을 뿐이다. 노동자도 부르주아의 일부일 뿐이다. 부르주아는 자본의 논리에 복종하는 한에서 노예계급이며, 모든 계층이 다 부르주아 계급이므로,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는 하나의 노예계급만이 있을 뿐이다. 이 책은 여기서 들뢰즈의 발언을 인용한다. “‘나 또한 종이다’라고 하는 것이 주인이 하는 새로운 말이다.”
그러므로 자본주의 체제를 극복하려면 노동자들의 경제투쟁만으로는 부족할 뿐만 아니라 그 투쟁 자체가 무망한 일이다. 그렇다면 대안은 없는가. 자본주의 체제가 산출한 부르주아 계급 질서 바깥으로 탈주하는 ‘비계급 되기’를 이 책은 극복 방안로 제시한다. 부르주아이기를 거부하고 화폐증식의 욕망 회로에서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자본주의 극복의 출구다. 그 출구는 자본주의 바깥으로 통해 있지만, 그 바깥은 사실은 내부에 있다. 부르주아 체제 안에서 비부르주아적인 공간을 만들어내고 자본주의에 구멍을 내는 것이다. 그 구멍이 무한히 많아지면 자본주의는 구멍만 남게 될 것이고, 그때는 이미 자본주의가 아닐 것이다. 이 책은 그렇게 미래를 전망한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거대한 톱니바퀴 앞에 선 노동자. <모더니티의 지층들>은 노동자계급도 화폐증식을 욕망하는 한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톱니바퀴에 끼인 부르주아 계급의 일부일 뿐이며, 자본주의는 자본주의 안에서 자본주의에 무수한 구멍을 내 형해화하는 리좀적 실천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말한다. 루이스 하인 사진. 그린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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